세상 일이라는 게 다 그렇죠.
한치 앞을 내다 보기가 힘듭니다.
특히 저같이 새로운 나라의 새로운 도시로 이사한 지가 얼마 되지 않고, 의사 소통도 완벽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인생이라는 이야기의 구성 요소 중에 즐거운 것들이 많으면 물론 좋겠지만 저는 알아요. 우울할 때는 또 저 밑바닥 끝까지 떨어져 봐야 한다는 것을요.
그게 삶의 참 쥬스라는 거를 잘 압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1월 1일에 폭탄이 터졌습니다. 타이베이 101 삘띙에서 새해를 알리는 폭죽이 예년에 비해 한껏 그럴듯한 모습으로 터진지 몇시간 뒤, 저는 여기서 신세를 지고 있는 친구와 좀 (심하게) 다퉜습니다. 그 와중에 친구가 좀 (심하게) 서운한 말을 하는 바람에 저는 짐을 싸서 나가 버리겠다고 선언을 합니다. (태국에서 보낸 소포까지 도착해서 짐은 120KG)
<Lost in translation>이라는 영화(저는 그영화 제목을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로 바꿔 버린 사람들을 종종 떠올리며 조롱합니다. 그 분들이야말로 <Lost in translation>한 분들이죠.) 있잖아요?
아니, 그런 제목은 밥 대신 무슨 약을 먹으면 지을 수 있는 겁니까?
저는 타이베이에 와서 또 한번 저 제목을 곱씹고 곱씹는 중입니다.
인간들 사이에서 언어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가 않아요. 외국 생활이 하루하루 날을 더해 갈수록 언어의 존재감은 오히려 커져만 갑니다.
한국어와 쭝궈말이 모국어인 저와 제 친구는 영어로 대화를 합니다. 서로 일상적인 대화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어요. 하지만 서로의 문화나 배경을 이해 해야만 웃어 넘길 수 있는 것들은 때때로 예기치 않게 상대방에게 비수를 꽂기도 합니다. 둘 다 흥분한 가운데 언성이 높아져서 한마디씩 뱉은 것이 새해 벽두부터 아주 꼴 좋은 장면을 연출하고야 말았습니다.
저는 '제 공간'이라는 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사람들 만나고, 우당탕탕 같이 어울리기를 좋아 하지만 어느 순간에는 '집'에 돌아와서 반듯한 저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야만 해요. 제가 이사 하면서 예산 보다 너무 큰 돈을 써버리는 바람에 허리띠를 졸라 매느라 저의 가장 기본적인 기질을 덮어두고 지냈더니 서로 예민해진 순간에 제게 '멘붕*'이 찾아 온 것입니다.
아무리 친한 친구 사이라도 같이 지내다 보면 문제점이 한두가지는 생기게 마련이죠. 알아요. 당연히 저는 이번에도 넉살 좋게 넘어갈 수도 있었지만, '내 공간이 없다.'는 심리적인 불안감이 저를 이겼어요.
그래서 1월 2일 학교 수업이 끝나고 저는 아고다에서 호텔을 하나 예약 했습니다.
혼자 있고 싶어서요.
허이구.
무엇보다 생일날 아침에는 풍성한 밥상을 받고 싶었어요.
호텔 아침 뷔페 그게 다 제 생일상은 아니지만 뭐 그런거 있잖수?
그래서 대형 호텔에 갈까 하다가 리뷰가 괜찮은 스린 야시장 근처의 호텔을 선택 했습니다.
방이 가격에 비해 큰편이라고 했고, 욕조가 있다고 하길래요. 뜨거운 물에 몸을 푹 담그고 정신에 평화를 되찾아 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갔더니 정말 방은 괜찮았어요. 꽤 넓은 편인데다 욕조도 있고 모던하고. 그런데 밖에서 쿵쾅쿵쾅 못 박는 소리가 나더라고요. 제가 좀 예민해져 있어서 그랬는지 그 소리를 도저히 참을수가 없었습니다. 한 이십분 있다가 방을 좀 바꿔 달라고 했더니 방이 그거 하나 딱 남았다고 하더라고요. 짜증이 났습니다. 그냥 좀 많이 짜증이 났어요. 그래서 그냥 대충 침대에 엎어져서 한숨 자면 괜찮아 지려나, 누우려고 보니까 아이씨, 시트에 누런 물방울 자국이 선명 하더라고요.
더 기분을 망치기 싫어서 그냥 조용히 예약을 취소 해달라고 했습니다. 직원도 올라와서 시트를 확인 하고는 두 말 없이 그렇게 해줬습니다.
그러다 생각해낸 곳이 바로 '베이터우'였습니다.
타이베이 북쪽의 온천지대에요. 시내에서 전철로 한시간이면 갈 수가 있는 무려 '유황 온천'지대입니다. 저는 이곳에 두번 온 적이 있었는데요, 유황 연기가 가득한 공기 속에서 뭔가 나올 것 같은 분위기가 참 좋았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는 온천을 좋아 하니까요.
사실 타이베이에 처음 놀러 왔을 때, 선택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도 바로 타이완에 온천이 많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태국에서도 겨울 되면 겨울 타지더라는 이야기는 전에도 한번 했죠? 그러고 있었는데 우연히 틀어놓은 NHK월드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노천탕 장면이 나와서 저를 온천 모드로 자빠뜨린 겁니다. 일본 대신 가까운 타이베이를 선택했던 거죠.
정처 없이 걸었습니다.
베이터우에는 일인당 우리돈 이천원짜리 일본식 올드스쿨 대중탕부터 하룻밤에 백만원이 넘는 고급 온천장까지 다양한 탕들이 있습니다. 어두워 졌을 때쯤 저는 안가본 이천원 짜리에 가볼까, 전에 갔었던 꽤 괜찮은 만오천원 짜리 일본식 노천탕에 가볼까 머릿속으로 셈을 하면서 동생에게 카톡으로 어리광을 부렸습니다. (차마 내용은 밝힐수가...)동생은 절더러 제발 현실감을 가지라고 하더군요.
맞습니다.
저는 올해에 좀 더 현실적인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저 때문에 우리 가족이 치르고 있는 현실적인 희생이 너무나 큰 것을 알고 있어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올해 정도에는 현실적인 결과물을 만들어 내야만 오늘의 제 일상같은 비현실적인 선택들을 더 할 수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블로그는 우리 가족 희생사입니다. 저같은 아들 절대 낳지 마세요.)
그래서 싼 곳에 몸을 좀 담갔다가, 어디 허름한 여관 같은데에 가서 대충 자고 아침은 좀 근사한 곳에 가서 먹어야겠다.
산을 내려가는 길에 근사한 곳이 너무 일찍 나와 버렸습니다.
이 근처에서 또 다른 두군데 근사한 고급 온천 리조트를 발견해서 들어가 가격을 물어 보고는 너무 높은 가격에 터벅터벅 대중탕 쪽으로 내려가던 길이었어요.
시각 디자인의 가치는 왜 알아갖고...
정말 주머니에 돈 없는 사람은 월페이퍼 같은 잡지 보면 안됩니다.
눈이 높아지는 것 만큼 인지부조화, 현실괴리감을 부추기는 것은 없습니다.
이 호텔에 계신 분들은 왜 그렇게 친절 하셔서 예약도 없이 들어간 저를 상냥하게 맞아 주셨으며 왜 에스코트까지 해가며 방을 보여 주셨으며 왜 주중이라 할인을 해주겠다 하셨으며 왜 생일이라니까 더 깎아 주겠다고 하신거며 왜 저 큰 침대를 보여줘서 왜 저에게 '결제의 순간**'을 맞게 하신 겁니까 왜?!
다 내꺼!
저 탕은 성인 둘이 들어가 오른쪽으로 비비고 왼쪽으로 비비고 해도 충분할 만큼 넓었고요, 에, 저 바깥 나무 너머로는 길과 건너편 숙소에서 이쪽을 훤히 들여다 볼 수 있는 야릇한 전망이...물론 블라인드가 있지만 취향에 맞게 이용하시면 되겠네요.
베이터우에 처음 왔을때 발견한 채식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습니다. 저 왼쪽 상단의 커리 우동이 생각나서 왔다가 메뉴에서 저 늠름한 만두(제가 만두를 무진장 좋아하는데 고기를 안먹으니 만두 먹을 곳이 마땅치 않잖아요?)를 보고 눈이 또 헥까닥 뒤집혀서 2인분을 시키고 말았네요. 다 먹었습니다. 뭔가 보상 받고 싶었어요. 채소로만 만든 음식이 무슨 맛이 있을까 하시는 분들은 타이완 한번 꼭 들러 보세요. 채식인구가 상당히 많고요, 다양한 방식으로 응용한 재밌는 요리들도 많습니다.
제 생일이 선명하게 찍혀 있군요.
방으로 돌아와서 탕에 들어 갔다가 사우나에 들어 갔다가 하다보니 땀이 났습니다.
기분도 좀 나아 졌어요.
자정이 넘어가자 여러 매체로, 그보다 더 많을 수는 없는 분들로부터 생일 축하가 날아 들었습니다. 쩍쩍 갈라진 논 위에서 시원한 장대비 맞는 것 같았어요. 편의점에서 사온 와인 한병을 홀짝홀짝 대면서 탕과 사우나를 몇 차례 왔다갔다 하는 와중에 스크린을 확인하며 혼자 실실 쪼개다가 푹 꼬꾸라져 깊은 잠에 들었습니다. 세상에 저곳의 침대 매트리스 위에는 전기 장판(타이완 호텔에 난방 시설 된 곳이 거의 없습니다)이 깔려 있었던 것입니다.
악마들! 전기장판 위에서 잠이 드는 순간은 <트레인스포팅>의 이완 맥그리거가 마룻바닥 저 밑으로 푹 꺼져 버리는 것처럼 아득하죠.
아침! 내 서른 한번째 생일날 아침!
커플끼리 오손도손 (화요일 아침부터 뭔 커플들이 그렇게 많은지) 화기애애한 와중에, 그것도 자리가 거기 밖에 없어서 양 커플 사이에 혼자 앉아서 많이 먹었습니다. 셀프로 구워먹는 와플도 구워서(네, 반죽 붓고요, 누가 채갈새라 그 옆에서 5분동안 지키고 서 있었습니다.)쵸코시럽이랑 꿀을 그냥 와장챵 뿌려 갖고 먹었습니다. 한입 떠 먹으면 짜릿하게 눈이 가늘어 지는 시큼달큼 패션 프루트도 그 위에 티스푼으로 옴쏙 긁어 얹어서 먹었어요.
정신이 바짝 들었습니다.
합!
힘을 내서 언덕을 내려 오는 길에 서울 집에 전화를 했습니다.
엄마가 전화를 안받아서 아빠한테 했어요.
"야 임마 인터넷으로 하지 뭐, 돈 나가게?" (아빠는 이멜을 좋아해)
엄마는 또 뭐랬는 줄 알아요?
"야, 엄마가 아들 생일이라고 굴 넣고 미역국 끓여 놨다. 냄새라도 맡아."
울릴려고 작정을 한 대사이지 않아요 이건? 하하!
"이렇게 해 놔야 외국에 있어도 어디 가서 밥 안 굶어."
이건 거기에 덧붙여 울엄마가 째박이에게 한 말이라는군요.
치.
매캐한 유황냄새 가득한 베이터우가 갑자기 더 후덥지근 해졌습니다.
추신. 아무튼 여러분, 절대로 생일을 혼자 보내겠다느니 이런 생각일랑 하시지 마세요.
하나도 재미 없습디다.
추신2. 여러분도 한국 나이 개나 줘 뻐리세요. 아니, 지들이 뭐 해준 거 있다고 나이까지 한살 더 멕입니까 우리더러 지금 엿 먹으라는 거에요?
일기 끝!
*멘(탈)붕(괴)
**결제의 순간은 명정한헨리몽고메리 선생에게 저작권이 있음을 밝힙니다.
한치 앞을 내다 보기가 힘듭니다.
특히 저같이 새로운 나라의 새로운 도시로 이사한 지가 얼마 되지 않고, 의사 소통도 완벽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인생이라는 이야기의 구성 요소 중에 즐거운 것들이 많으면 물론 좋겠지만 저는 알아요. 우울할 때는 또 저 밑바닥 끝까지 떨어져 봐야 한다는 것을요.
그게 삶의 참 쥬스라는 거를 잘 압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1월 1일에 폭탄이 터졌습니다. 타이베이 101 삘띙에서 새해를 알리는 폭죽이 예년에 비해 한껏 그럴듯한 모습으로 터진지 몇시간 뒤, 저는 여기서 신세를 지고 있는 친구와 좀 (심하게) 다퉜습니다. 그 와중에 친구가 좀 (심하게) 서운한 말을 하는 바람에 저는 짐을 싸서 나가 버리겠다고 선언을 합니다. (태국에서 보낸 소포까지 도착해서 짐은 120KG)
<Lost in translation>이라는 영화(저는 그영화 제목을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로 바꿔 버린 사람들을 종종 떠올리며 조롱합니다. 그 분들이야말로 <Lost in translation>한 분들이죠.) 있잖아요?
아니, 그런 제목은 밥 대신 무슨 약을 먹으면 지을 수 있는 겁니까?
저는 타이베이에 와서 또 한번 저 제목을 곱씹고 곱씹는 중입니다.
인간들 사이에서 언어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가 않아요. 외국 생활이 하루하루 날을 더해 갈수록 언어의 존재감은 오히려 커져만 갑니다.
한국어와 쭝궈말이 모국어인 저와 제 친구는 영어로 대화를 합니다. 서로 일상적인 대화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어요. 하지만 서로의 문화나 배경을 이해 해야만 웃어 넘길 수 있는 것들은 때때로 예기치 않게 상대방에게 비수를 꽂기도 합니다. 둘 다 흥분한 가운데 언성이 높아져서 한마디씩 뱉은 것이 새해 벽두부터 아주 꼴 좋은 장면을 연출하고야 말았습니다.
저는 '제 공간'이라는 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사람들 만나고, 우당탕탕 같이 어울리기를 좋아 하지만 어느 순간에는 '집'에 돌아와서 반듯한 저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야만 해요. 제가 이사 하면서 예산 보다 너무 큰 돈을 써버리는 바람에 허리띠를 졸라 매느라 저의 가장 기본적인 기질을 덮어두고 지냈더니 서로 예민해진 순간에 제게 '멘붕*'이 찾아 온 것입니다.
아무리 친한 친구 사이라도 같이 지내다 보면 문제점이 한두가지는 생기게 마련이죠. 알아요. 당연히 저는 이번에도 넉살 좋게 넘어갈 수도 있었지만, '내 공간이 없다.'는 심리적인 불안감이 저를 이겼어요.
그래서 1월 2일 학교 수업이 끝나고 저는 아고다에서 호텔을 하나 예약 했습니다.
혼자 있고 싶어서요.
허이구.
무엇보다 생일날 아침에는 풍성한 밥상을 받고 싶었어요.
호텔 아침 뷔페 그게 다 제 생일상은 아니지만 뭐 그런거 있잖수?
그래서 대형 호텔에 갈까 하다가 리뷰가 괜찮은 스린 야시장 근처의 호텔을 선택 했습니다.
방이 가격에 비해 큰편이라고 했고, 욕조가 있다고 하길래요. 뜨거운 물에 몸을 푹 담그고 정신에 평화를 되찾아 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갔더니 정말 방은 괜찮았어요. 꽤 넓은 편인데다 욕조도 있고 모던하고. 그런데 밖에서 쿵쾅쿵쾅 못 박는 소리가 나더라고요. 제가 좀 예민해져 있어서 그랬는지 그 소리를 도저히 참을수가 없었습니다. 한 이십분 있다가 방을 좀 바꿔 달라고 했더니 방이 그거 하나 딱 남았다고 하더라고요. 짜증이 났습니다. 그냥 좀 많이 짜증이 났어요. 그래서 그냥 대충 침대에 엎어져서 한숨 자면 괜찮아 지려나, 누우려고 보니까 아이씨, 시트에 누런 물방울 자국이 선명 하더라고요.
더 기분을 망치기 싫어서 그냥 조용히 예약을 취소 해달라고 했습니다. 직원도 올라와서 시트를 확인 하고는 두 말 없이 그렇게 해줬습니다.
아 썅.
이때쯤 친구는 이미 화가 풀려서 저보고 미안하다고, 아는 사람도 별로 없는 곳에서 혼자 생일 맞지 말고 같이 나가 놀자고 아이메세지를 보내 왔습니다.만 저는 3G를 꺼버렸어요.
유치하죠?
일본군 병원, 분위기 있죠?
그러다 생각해낸 곳이 바로 '베이터우'였습니다.
타이베이 북쪽의 온천지대에요. 시내에서 전철로 한시간이면 갈 수가 있는 무려 '유황 온천'지대입니다. 저는 이곳에 두번 온 적이 있었는데요, 유황 연기가 가득한 공기 속에서 뭔가 나올 것 같은 분위기가 참 좋았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는 온천을 좋아 하니까요.
사실 타이베이에 처음 놀러 왔을 때, 선택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도 바로 타이완에 온천이 많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태국에서도 겨울 되면 겨울 타지더라는 이야기는 전에도 한번 했죠? 그러고 있었는데 우연히 틀어놓은 NHK월드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노천탕 장면이 나와서 저를 온천 모드로 자빠뜨린 겁니다. 일본 대신 가까운 타이베이를 선택했던 거죠.
안개와 유황내 가득한 베이터우
정처 없이 걸었습니다.
베이터우에는 일인당 우리돈 이천원짜리 일본식 올드스쿨 대중탕부터 하룻밤에 백만원이 넘는 고급 온천장까지 다양한 탕들이 있습니다. 어두워 졌을 때쯤 저는 안가본 이천원 짜리에 가볼까, 전에 갔었던 꽤 괜찮은 만오천원 짜리 일본식 노천탕에 가볼까 머릿속으로 셈을 하면서 동생에게 카톡으로 어리광을 부렸습니다. (차마 내용은 밝힐수가...)동생은 절더러 제발 현실감을 가지라고 하더군요.
맞습니다.
저는 올해에 좀 더 현실적인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저 때문에 우리 가족이 치르고 있는 현실적인 희생이 너무나 큰 것을 알고 있어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올해 정도에는 현실적인 결과물을 만들어 내야만 오늘의 제 일상같은 비현실적인 선택들을 더 할 수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블로그는 우리 가족 희생사입니다. 저같은 아들 절대 낳지 마세요.)
그래서 싼 곳에 몸을 좀 담갔다가, 어디 허름한 여관 같은데에 가서 대충 자고 아침은 좀 근사한 곳에 가서 먹어야겠다.
근사하다
산을 내려가는 길에 근사한 곳이 너무 일찍 나와 버렸습니다.
이 근처에서 또 다른 두군데 근사한 고급 온천 리조트를 발견해서 들어가 가격을 물어 보고는 너무 높은 가격에 터벅터벅 대중탕 쪽으로 내려가던 길이었어요.
정신을 차려보니
시각 디자인의 가치는 왜 알아갖고...
정말 주머니에 돈 없는 사람은 월페이퍼 같은 잡지 보면 안됩니다.
눈이 높아지는 것 만큼 인지부조화, 현실괴리감을 부추기는 것은 없습니다.
침대는 커야혀
이 호텔에 계신 분들은 왜 그렇게 친절 하셔서 예약도 없이 들어간 저를 상냥하게 맞아 주셨으며 왜 에스코트까지 해가며 방을 보여 주셨으며 왜 주중이라 할인을 해주겠다 하셨으며 왜 생일이라니까 더 깎아 주겠다고 하신거며 왜 저 큰 침대를 보여줘서 왜 저에게 '결제의 순간**'을 맞게 하신 겁니까 왜?!
음.
태국 살 때 제 침대가 저만 했어요. 아직도 가끔 눈 뜨면 여기가 태국인가 하거든요.
뭐, 거기에 다음과 같은 여러가지 요인이 더해져 약해진 제 정신력을 정복 했습니다.
샤워 부스에는 스팀 사우나
그 맞은 편에는 건식 사우나
앉을 일은 없었지만 소파
발코니 온천탕!
다 내꺼!
저 탕은 성인 둘이 들어가 오른쪽으로 비비고 왼쪽으로 비비고 해도 충분할 만큼 넓었고요, 에, 저 바깥 나무 너머로는 길과 건너편 숙소에서 이쪽을 훤히 들여다 볼 수 있는 야릇한 전망이...물론 블라인드가 있지만 취향에 맞게 이용하시면 되겠네요.
이 나무 이름 뭐죠?
제가 저 개구리 왕눈이 나무 참 좋아 하는데요, 저 '알로카시아(아 이런 고상한 정보도 깨알 같고 이 블로그 참 유익하다)'가 타이완에서는 길가에 아무렇게나 막 자랍니다. 제가 여기서 걸어 가니다가 가장 자주 발걸음을 멈추는 이유이기도 해요. 재네들 사진 찍을라고요.
이게 다 100% 채식 메뉴
베이터우에 처음 왔을때 발견한 채식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습니다. 저 왼쪽 상단의 커리 우동이 생각나서 왔다가 메뉴에서 저 늠름한 만두(제가 만두를 무진장 좋아하는데 고기를 안먹으니 만두 먹을 곳이 마땅치 않잖아요?)를 보고 눈이 또 헥까닥 뒤집혀서 2인분을 시키고 말았네요. 다 먹었습니다. 뭔가 보상 받고 싶었어요. 채소로만 만든 음식이 무슨 맛이 있을까 하시는 분들은 타이완 한번 꼭 들러 보세요. 채식인구가 상당히 많고요, 다양한 방식으로 응용한 재밌는 요리들도 많습니다.
이거 기념으로 갖고 오려고 했는데 까먹었다.
제 생일이 선명하게 찍혀 있군요.
방으로 돌아와서 탕에 들어 갔다가 사우나에 들어 갔다가 하다보니 땀이 났습니다.
기분도 좀 나아 졌어요.
자정이 넘어가자 여러 매체로, 그보다 더 많을 수는 없는 분들로부터 생일 축하가 날아 들었습니다. 쩍쩍 갈라진 논 위에서 시원한 장대비 맞는 것 같았어요. 편의점에서 사온 와인 한병을 홀짝홀짝 대면서 탕과 사우나를 몇 차례 왔다갔다 하는 와중에 스크린을 확인하며 혼자 실실 쪼개다가 푹 꼬꾸라져 깊은 잠에 들었습니다. 세상에 저곳의 침대 매트리스 위에는 전기 장판(타이완 호텔에 난방 시설 된 곳이 거의 없습니다)이 깔려 있었던 것입니다.
악마들! 전기장판 위에서 잠이 드는 순간은 <트레인스포팅>의 이완 맥그리거가 마룻바닥 저 밑으로 푹 꺼져 버리는 것처럼 아득하죠.
합죽이가 됩시다!
아침! 내 서른 한번째 생일날 아침!
커플끼리 오손도손 (화요일 아침부터 뭔 커플들이 그렇게 많은지) 화기애애한 와중에, 그것도 자리가 거기 밖에 없어서 양 커플 사이에 혼자 앉아서 많이 먹었습니다. 셀프로 구워먹는 와플도 구워서(네, 반죽 붓고요, 누가 채갈새라 그 옆에서 5분동안 지키고 서 있었습니다.)쵸코시럽이랑 꿀을 그냥 와장챵 뿌려 갖고 먹었습니다. 한입 떠 먹으면 짜릿하게 눈이 가늘어 지는 시큼달큼 패션 프루트도 그 위에 티스푼으로 옴쏙 긁어 얹어서 먹었어요.
정신이 바짝 들었습니다.
합!
힘을 내서 언덕을 내려 오는 길에 서울 집에 전화를 했습니다.
엄마가 전화를 안받아서 아빠한테 했어요.
"야 임마 인터넷으로 하지 뭐, 돈 나가게?" (아빠는 이멜을 좋아해)
엄마는 또 뭐랬는 줄 알아요?
"야, 엄마가 아들 생일이라고 굴 넣고 미역국 끓여 놨다. 냄새라도 맡아."
울릴려고 작정을 한 대사이지 않아요 이건? 하하!
"이렇게 해 놔야 외국에 있어도 어디 가서 밥 안 굶어."
이건 거기에 덧붙여 울엄마가 째박이에게 한 말이라는군요.
치.
매캐한 유황냄새 가득한 베이터우가 갑자기 더 후덥지근 해졌습니다.
추신. 아무튼 여러분, 절대로 생일을 혼자 보내겠다느니 이런 생각일랑 하시지 마세요.
하나도 재미 없습디다.
추신2. 여러분도 한국 나이 개나 줘 뻐리세요. 아니, 지들이 뭐 해준 거 있다고 나이까지 한살 더 멕입니까 우리더러 지금 엿 먹으라는 거에요?
일기 끝!
*멘(탈)붕(괴)
**결제의 순간은 명정한헨리몽고메리 선생에게 저작권이 있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