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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c

빠르크 [1]

Parc 1st Anniversary Special Logo by NANAN


[지난 날]

2007년이 되자마자 저는 잘 다니던 M2에 6주간 휴가를 내고 뉴욝과 론돈으로 3/3주 여행을 떠났습니다.


저는 당시에 군대에 가겠다는 마음이 전혀 없었으므로, 이 여행을 마치고 둘 중에 더 마음에 드는 도시에 정착 하겠다 마음을 먹은 것이죠. 


여행은 어마어마 했습니다. 전혀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않고 떠난 여행인데도 초단위로 놀라운 일들이 저를 덮쳐 줬습니다. 마치 그 두 도시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정신 못차릴 정도로 솔깃한 카드들을 제 앞에 툭툭 던졌습니다. 제가 20대 내내 존경하고 동경해 마지 않았던 도시 론돈에서는 론돈 씬의 한복판에 있는 친구를 알게 되어 그 한복판에 있는 사람들을 여럿 만나 저를 소개할 기회를 가지기도 했습니다. 저는 당시에 스스로 느낄 수 있을만큼 VJ로서 꽤 물이 올라 있었기 때문에 누구를 만나던 자신감 있게 그들과 이야기 했고, 그들이 보인 반응에 맙소사 나는 여기에 와도 뭐든 할 수 있겠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전설의  <디엔드> 사장이 론돈에 와서 일해 보는건 어떠냐고 물어 왔을때 그냥 저는 저를 너무 내려 놓았나봐요.


항상 중요한 순간에 다 내려놓고 빙 둘러 가는 쪽으로 갔어요 저는 20대 내내.


그 난리법석의 한복판에서 돈 떨어져 서울에 전화를 했었는데 엄마가 다짜고짜 쌍욕을 날리면서 "영장 나왔다."고 하는 겁니다. 영장이야 여러번 받아 봤으니 연기 하면 된다고 생각 했는데, 이건 정말 최후의 영장 같은 거여서 정 연기를 하려면 제가 직접 병무청에 가야 한다고 하더군요. 일단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날 밤에는 브릭스턴 <플랜 B>에서 DJ SPEN(터치) 음악 트는 것을 보러 갔었는데요, 이 형은 제가 서울에 오셨을때 연준이 형과 함께 서울투어도 시켜 드린 적이 있어서 뭔가 꼭 보고 싶은 그런 마음이 들어서 간겁니다. 이날밤에는 제가 론돈에 꽤 자주 갔으면서도 한번도 만나지 못했던 어메이징 미미누나도 오랜만에 만나서 저는 이미 클럽 천장에 붙어 있는 사람이 됐습니다. 그날 분위기는 제가 싸이월드에 꽤 근사하게 잘 적어 두었더군요.(터치) 


바로 이 밤에 저는 하느님께서 제가 한 모든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군대에 다녀 와라.'하신 음성을 들었고, 그렇게 가기 싫어 했던 마음을 손바닥 뒤집었습니다.


군대 생활을 누가 저보다 더 잘 할 수 있을까 할 정도로 잘 지내고 나왔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 2년간 저는, 제가 시스템에 순응 할수도 있는 존재였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 몹시 수치스러웠습니다. 내가 속했던 사회와 그동안의 단절은 또 어떻고요. 그런 상태로 창조적인 영역에 돌아갈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떠났습니다. 나난과 라오스, 태국과 유럽의 나라들을 '미친 듯이' 다녔고, 이샤이를 만나러 이스라엘에 갔다가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경유지 방콕에서 짐을 싹 빼서 딱 세달만 살아보자 하고 태국 생활을 시작한 겁니다. 세달 다음에 또 세달, 비자를 갱신할 때마다 술만 마시면 좀비처럼 쏟아내던 군대 이야기가 쏙 들어 갔습니다. 다행이죠. 발리,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캄보디아, 라오스, 인도, 네팔, 씨킴, 타이완, 홍콩, 노르웨이, 스웨덴, 이탈리아를 여행 했습니다. 저는 하루가 다르게 나아졌고, 드디어 태국 길가에 늘어져 있는 개같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태국에 꼭 한번 살아보고 싶다는 일생의 소원을 풀었고, 천사같이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났고, 서울에서 저를 보러오는 지친 친구들 이야기를 많이 들어 주었습니다. 또, 태국에는 어떤 맛들이 있고, 그 많은 식당들의 천만가지 조리법 중에 어떤 집의 뭐가 더 괜찮은 것인가를 가려낼 능력도 생겼습니다. 당시에도 '아, 미래의 나는 아마 지금 나를 무척 부러워 할 것 같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만큼 천국에서의 삶이었습니다. 


태국 생활 2년째가 되고서 저는 책을 쓰겠다고 맥북 앞에 앉아있기 시작 했지만, 페이스북 댓글 달다 보면 어느새 해가 떴습니다. 이런저런 방법을 안써본 것이 아니지만 애초에 '쉬러' 간 곳에서 일같이 뭔가를 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냥 거기서는 일이라는 것을 아예 하고 싶지가 않았다고 하는 편이 더 맞습니다.


그래서 타이베이로 만다린을 배우러 가기로 했습니다. 타이베이에서는 많이 힘들었습니다. 새로운 곳에 가서 낯선 환경을 뛰어 넘는 것을 그 무엇보다 즐거워 하는 저였지만 거기서는 어디서 부터인지 주파수를 맞추는데 실패해 버렸습니다. 완전히.


놀아도 흥이 나지 않고, 마셔도 취하지가 않았습니다. 그 와중에 오직 더 극렬한 쾌락에만 몰두 했는데, 그쪽으로 난 문들을 하나씩 열고 나면 일상은 더욱 지루했습니다. 주말을 제외하면 늦게까지 술 마시고 노는 문화가 없는 대만에서 저는 순식간에 지독한 욕구불만과 우울에 빠져 들었고, 달리 어찌 손 쓸 방법도 없었습니다. 놀면 놀수록- 까칠한 모래 벽에 이미 코가 닿아 있는데도 그쪽으로만 자꾸 안달하여 발을 구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갑자기 갔던 캘리포니아에서 저는 많이 나았고, 거기서 만난 누나들이 열심히 꿈을 쫓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 보고는 드디어 현실감각을 회복하기 시작했습니다. 


'경제적으로 독립하겠다.' 다짐 했습니다. 베니스에서요.


[허정희 여사, 엄마]

엄마의 아버지는 매우 엄한 아버지였답니다. 엄마는 할아버지가 무서워서 중학교 3학년때 집에서 도망 나왔을 정도였다고 했어요. 시대 자체가 배배 꼬여서 그랬던 건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희 할아버지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으로 집에서 요리를 해주는 아버지였던 겁니다. 항상 장은 당신이 직접 봐다가, 엄마 고향이 순천이니까 인근 지역에서 나는 그 산해진미들을 사다가 새우는 튀기고 아지는 구워서 그시절 그동네 어느집도 그렇게는 못먹고 살았다는 풍요로운 저녁상을 차리곤 했다고 합니다. 


할아버지는 일벌레셨고, 추진력이 엄청난 분이시라 완전히 망하셨었는데도 환갑이 넘은 이후에 재기에 성공 하셨습니다. 할아버지는 건축업자셨는데요, 집 빨리 짓는 것으로 신문에 날만큼 순천에서 아주 유명한 분이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엄하게 구셨으면서도 우리 엄마가 서른이 넘어 '혼자 살겠다.' 선언을 하니까 '여자가 혼자 사는데 가진 거 없으면 추하다.'며 서울에 집을 사주셨습니다. 바로 그 집에서 제가 태어 났고요, 단 한번도 이사를 한 적이 없이 최근까지 살았습니다. 능력 좋은 남자 덕을 삼대가 누린거죠. 저는 지금도 꿈을 꾸면 '집'이라는 공간은 항상 그집이에요. 


그 집에서는 일년에 네번씩 박씨들이 잔뜩 모이는 대형 행사가 열렸습니다. 친할아버지 할머니 제사, 추석, 설. 우리 엄마는 시집 와서 고모들이랑 갈등이 무척 심했는데요, 할머니께서 일찍 돌아 가셔서 이쪽은 고부간의 갈등도 아니고 시누이-시언니 갈등이었죠. 우리 박씨 여자들은 덩치들이 산만한데 우리 엄마는 아주 쪼그만 여자라서 그 싸우는 꼴을 보고 있으면 어린 제 눈에도 그냥 엄마가 참 안쓰러울 정도였습니다. 단 한번도 그런 행사가 히히호호 끝나는 적이 없었고요.


그런데 우리 엄마가 서른명에 가까운 왁자지껄 '박씨족속'들을 완벽하게 휘어잡아 다스리는 순간이 있었으니 바로 음복 이후의 식사 시간이었습니다. 뭐 이게 어떻네 저게 어떻네 답도 없이 다투던 입들이 아 조용해 졌습니다. 제가 어렸지만 그 압도적이고 엄숙한 승리의 순간이 품은 그 묘한 짜릿함은 분명히 기억합니다. 경기도에 살던 우리 아빠 쪽 집안에는 사실 우리 엄마가 들어오기 전까지 이렇다할 조리법이란게 있었나 싶습니다. 같은 언어를 쓴다고 모두가 집에서 같은 맛을 보고 사는건 아닙니다. 그러니 아빠의 형제들이 느꼈을 미각 충격이 얼마나 폭발적이었겠어요? 거기다 대고 엄마는 매번 보란듯이 융숭한 상을 차렸습니다. 서른 명이 배가 터지게 먹고, 다들 집에 한 보따리씩 싸가고도 음식이 남았을 정도로 양도 엄청났고요. 그걸 늘 거의 혼자 다 했습니다.


엄마는 처녀 때부터 어디 가서 맛있는 거를 먹고 오면 꼭 집에 와서 흉내를 내봤다고 합니다. 요리책도 펼쳐보지 않고 순전히 '이걸 이렇게 해보면 저런 맛이 나지 않을까?' 호기심으로 실험을 이어 나갔고, 거기서 자신만의 레시피들을 하나씩 완성했습니다. 엄마가 젊었을 때 화교 분들이 운영하는 중국집 2층에서 자취를 한 적이 있다고 해요. 그 댁 해파리 냉채를 먹어 봤는데, 이게 너무 새로운 맛이고 좋으니까 만드는 법을 물어 봤는데, 그렇게 엄마를 예뻐했던 주인 내외가 모르쇠로 나오더랍니다. 엄마가 그래서 몇 날을 이렇게 해보고 저렇게 해본 끝에 와사비를 풀어서 냉채를 해다가 주인 내외 앞에 내밀었답니다. 주인 어른이 그맛을 보더니 눈을 띠용- 휘둥그레 띠용! 그러더니 '야, 정희야, 너 이거 어떻게 만들었냐?' 하시더래요. 그게 정말 통쾌했던지 엄마는 일년에 한번 정도는 저한테 이 얘기를 해줍니다.


순천에서 나고 자랐지만 엄마는 중3때 서울로 와서 쭉 살았기 때문에 사실 서울 사람이라고 하는게 더 정확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뒤에 까다롭기로는 관악구 표준을 뛰어 넘었던 저와 동생이 태어났고, 저희가 어렸을 때는 하숙도 쳤으니까 우리 엄마는 숙명적으로 요리를 멈출 수 없었던 거에요. 젊고 에너지 넘쳤던 엄마는 우리 형제들 입맛에 맞게, 여러 도시에서 모여든 서울대학생들 제각각 입맛에 맞게 꾸준히 자기 음식들을 틀어주는 작업을 했습니다. 어렸을 때를 떠올려 보면 엄마는 항상 부엌 싱크대 위에 갓달린 형광등 빛 아래서 뭔가 하고 있어요. 그때 엄마 나이를 따져 보니 지금 제 나이랑 비슷하네요. 그런데 엄마는 이미 김치, 오이소박이, 나박김치, 동치미, 갈비찜 같은 거를 다 만들 줄 아는 사람이었던 거에요.


그때 상에 오른 엄마 음식들은 전라도스럽기도 하고 서울스럽기도 하고 국제적이기도 했어요. 돈까스, 핏짜, 계란밥, 함박 스테이크도 있었고, 심지어 팬케이크를 만들어 주기도 했으니까요. 돈까스 만들 때는 그냥 케챱을 뿌려 주는게 아니라 양파를 슬라이스 쳐서 마늘 간거랑 캬라멜라이즈드 한다음에 간장, 참기름, 케챱 넣고 소스를 따로 만들어 끼얹어 줬어요. 국물 대신 옥수수 숲도 주고. 거기다 대고 입에 안맞으면 '맛 없어, 안 먹어!'를 붙였던 매몰찬 져지 아들이 둘이나 있었던거지. 


[박모과]

그런 엄마를 둬서 그런가 저도 뭘 먹으러 다니는 것을 참 좋아하는 사람으로 자랐습니다. 20대에 접어들자 요리 하는 것에도 관심이 생겼고요. 요리는 하면 할수록 더 진지하게 빠져 들었습니다. 친구들 불러다 뭐 해서 나눠 먹고 이런 거의 재미를 알기 시작하니까 더 즐기게 되더라고요. 스무살 때 고기를 끊으면서부터는 제가 먹는건 거기에 무엇이 들어 갔는지 정확하게 알고 먹고 싶게 됐고, 거기서 저 때문에 일을 두번씩 해야 할 엄마의 수고를 덜어주기 위해서 제가 먹을 것은 제가 요리하기 시작했습니다. 고기를 안먹으면, 특히 저같이 매끼 어마어마한 양의 고기를 소비하던, 활동적이고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젊은 남자에게라면 몸의 영양 균형을 유지 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고 생존에 직결된 화두가 됩니다. 하루 동안 제가 먹는 모든 음식들이 결과적으로 발란스가 맞는 것인지를 지난 15년간 매일 따져보고 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태국과 대만에 살때는 절실함에 요리를 했습니다. 워낙 길거리 음식과 식당에서 외식 하는 것을 좋아 하는데, 저 두나라에서는 외식만 하고 오면 기진맥진 해서 아무 것도 못할 정도가 되곤 했거든요. '푸드 코마'를 넘어서 '푸드 블랙아웃' 같은게 오곤 했습니다. 온몸이 땡땡 붓고, 머릿속이 뭔가 꽉 차는 느낌이 들다가 한순간에 곯아 떨어져서 2-30분을 죽은듯 자게 되는 게 MSG에 대한 제 몸의 특이반응입니다. 태국과 대만의 길거리 식당에서 음식 만드는 모습을 아 좋아 애처럼 보다 보면 저 왕국자 삼분의 일을 채워 투하하는 하얀 가루가 도대체 뭐냐 할 건 뭐냐 그걸 안 넣으면 내가 좋아하는 그맛이 안나는데. 그 맛도, 음식들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좋으니까 먹기는 먹어야 겠고, 나도 살아야 겠고. 그래서 요리를 했어요.


하루에 한번은 꼭. 많으면 두번까지 집에서 해먹었습니다. 밖에 나가서 쎈거 먹어야 하니까 집에서는 소금도 거의 넣지 않고 재료 본연을 즐기는 방향으로. 요리는 날마다 생계형으로 하면 그만큼 생계적으로 실용적으로 아이디어도 재주도 늘더라고요. 어디서 본 건 있으니까 좋았던 것은 다 갖다 대입 해보고. 그런 생활이 3년 정도 되니까 플레이팅에도 관심 생기고, 때마침 인스타 그램에도 입문 했으니까 한끼한끼 끼를 부려 먹기 시작했습니다.


물려받은 엄마 피가 진한 건지 어디 가서 한번 두번 먹어본 것은 따로 배우지 않고도 꽤 비슷한 맛을 내곤 했으니까, '아! 진지하게 요리를 해보는 건가?'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연결 됐습니다. 그런데 참 희한한게, 이탈리안 타이는 흉내를 낼 수가 있겠는데, 엄마가 해줬던 반찬들은 도무지 감이 안잡히는 거에요. 공을 들여 만들어 본 갈치 조림도 엉망, 애호박 볶음도 영 아니었습니다. 그때마다 서울에 국제전화를 해서 엄마한테 레시피를 물어 보면 

'간장 쪼금 넣고, 고춧가루 쪼금 넣고, 마늘 좀 갈아넣고, 블라블라블라.' 

...이게 될리가 있습니까?


그래서 '나는 우리 엄마 나이 더 들기 전에 엄마 레시피 싹 배워서 정리 해야겠다.'가 나온거죠. 사진도 예쁘게 찍어서 멋드러진 엄마 레시피 북을 만들어서 내가 갖고, 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몰라, 팔아서 잘먹고 잘살아야겠다. 그런데 한국에 완전히 들어와 사는건 싫고. 한국에 괜히 오래 갔다가는 붙들려 다시 못 나올 것 같고. 그래서 이 '프로젝트'도 일년 넘게 묵혔어요.


[743-1]

한남동 743-1번지.

대만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서울에 잠깐 들어 왔을때, 원선이 형이 2E라는 바를 열려고 준비 중이니 놀러 오라고 했어요. 남산자락 아래인 데다가, 주변에 멋진 미술관이 있다는 것이 이 집에 들어서기 전에 이미 기분 좋아지게 했습니다. 형은 참 끼돌이니까 정말 화장실 손잡이 하나까지 세심하게 잘 골랐더라고요. 주차장으로 쓰면 딱 좋을 마당에 차는 물론 스쿠터 한대도 대지 못하게 하고 '빈 공간이 주는 여유'를 선택한 탁월함. 서울이라는 꽉 묶인 도시 속에서 시간이 갈수록 그 가치가 돋보입니다.  


"그럼 2층에는 뭐가 있어?"

거기에 여유로운 서재같은 서점을 열려고 준비중이라는 우지민이가 2층을 구경시켜줬습니다.


!!!!!


마당 쪽으로 뻥 뚫려 한낮의 햇살을 듬뿍 머금고 하얀 벽돌들이 온 공간에 그 햇살을 반사시켜 온 몸과 존재가 포근함을 느끼게 해주는 공간. 1976년에 지은 이 공간을 처음 보자마자 제 안에서 '딱!' 명쾌한 손가락 튕기는 소리가 났습니다. 그리고는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해버렸습니다.


"여기엔 한식당을 해야겠네."


갑자기 신이 났습니다. 그동안 멈춰 있던 모든 '일 중추'가 서울역 앞 대우빌딩 출근시간 형광등 켜지듯 깨어 났습니다. 


"지민아, 나 아이디어 하나 생겼는데 들어봐. 우리 엄마 레시피를 정리해서 그 레시피로 만든 음식을 내는 한국 가정식집을 해보자. 어때?"


[우지민]

지민이는 제가 아는 성인 휴먼들 중에서 가장 '쪼끄맣고 찌끄만' 애지만요, 속은 아주아주 깊고 넓은 친구입니다. 또 저랑은 다른 분야에서 예민하고, 사리판단이 정확합니다. 관리직 경험이 있어서 회계, 세무, 기초 관련 법률에 대한 지식도 풍부 하고요. 그런데 이 모든 능력들은 우리가 비즈니스 파트너가 된 후에 알게된 것들입니다.


그 전에 제가 알던 지민이는 친구들 사이에서 사진을 진짜 못찍고, 엉뚱하고, 영원히 자랄 것 같지 않은 애지만, 친구들 중 누군가에게 절실하게 도움이 필요하면 나타나 크고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엉뚱 도깨비 같은 애였습니다. 저한테는 군대에서 토익 시험을 준비하고 있을때 자진해서 금쪽 같은 토익 책들을 보내 줬고요, 방콕에 살때는 휴가길에 항상 꽉꽉 채운 모국산 생필품들을 챙겨다 주곤 했습니다. 우리가 진짜 친해진건 태국에서 였어요.


친구지만 꽤 오랫동안은 둘이만 만나기엔 좀 어색한 사이였는데, 태국에서 먹으러 다니면서 이친구를 다시 보게 됐습니다. 제가 진짜 많이 먹거든요, 그런데 지민이는 저한테 안질만큼 먹더라고요. 제 노르웨이 친구들이 저 먹는 모습을 보고 '야, 넌 그 먹는게 도대체 다 어디로 가는거야?' 했는데요, 제가 그 질문을 똑같이 지민이 한테 할 정도니까요. 똑같지는 않지만 대체적으로 먹는 취향도 비슷합니다. 그랬으니까 지민이가 태국에 오면 서로 아주 신이 났죠. 먹고먹고 또 먹어도 또 맛있는 먹을게 있고, 저는 소개를 해줘서-맛있게 먹어주니 신나고, 쟤는 신기한 것들 먹어 보는데-그게 다 맛있으니 신나고. 뭐, 이런 폭식 휴가가 저 태국 있는 동안 세번인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민이는 제 입맛이며 취향을 매우 신뢰하고 있었고, 그 사이사이 제가 해준 음식들을 통해서도 맛에 대해서는 저를 많이 믿어 주었습니다.만 얘가 -다시는 서울에 안들어 올 것 같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일 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던 배짱이가- 사업 제안을 해올줄 1%라도 예감해 봤겠습니까?  


그런데 뭘 본건지, 홀린건지.

지민이는 단박에

"그래, 해보자."고 합니다.



Seriously?!


거침 없이 벽도 후려 날리고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