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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미팅]
지민이가 엄청난 모험이 될수도 있는 제 제안을 시원스레 받아들여 오케이 했으니까 저도 큰 액션을 취해야 했습니다. 저는 떠돌던 생활을 다 접고 서울에 돌아 오기로 합니다. '어떻게 하면 캘리포니아에 가서 내가 하고 싶었던 것들을 해낼 수 있을까?'만 생각하던 저도 제 모든 몽상을 일단 접기로 한거죠. 외국 생활이 길어 질수록 저는 제가 스무살 때 백남준 선생님에 대해 디깅하다 스스로 찾은 답에 깊이 몰두하게 됐습니다. 일단 남한을 떠났으면 다시는 돌아오지 말아야 뭐든 될 수 있다는 거였어요. 나도 그땐 이미 4년에 가깝게 서울을 떠나 있었으니까 떠난 채로 뭐든 되겠다는 다짐도 했었습니다. 89% 자유분방하게 살았어도 깊은데 각인된 '출세해서 엄마 호강시켜 줘야지.' 조선 장남 클리셰를 떨쳐 버리지 못하는 저였으니까 그냥 놀다 돌아온 애가 되는건 싫었습니다.만 이제는 일을 할 시간이 됐습니다.
7월 말에 서울에 왔다가 타이베이로 돌아 갔다가 8월 중순에 지민이랑 방콕에서 만나서 첫 빠르크 아이디어 회의를 했습니다. 빠르크라는 이름은 이미 미팅 전에 아이 메세지 상으로 그렇게 하기로 한번에 합의를 봤습니다. 사업, 아니 장사를 하려면 뭐든 자신이 가장 자신이 있는 좋은 것을 내다 팔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때 제가 가진 가장 좋은 것, 우리 집에서 가장 훌륭한 것이 바로 우리 엄마 음식 솜씨였으니까 저는 거기에 제 성을 걸기로 한겁니다.
'박씨 집안의 보물을 내다 판다, 빠르크.'
빠르크는 바르셀로나가 있는 까딸루냐 지역언어로 '공원'이라는 뜻입니다. 저는 박씨고요. 처음 Park라는 박씨들 영문 표기를 봤을 때부터 저는 그게 너무 바보 같아서 싫었어요. '공원' 집안이라니요. 그래서 저는 박세리 선수를 따라 R을 뺀 PAK를 여권에 박아서 들고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스무살때 이비자 가는 배를 타러 바르셀로나에 갔을 때 구엘 공원에서 정말 꿈결같은 하루를 보낸 적이 있었는데요, 거기서 'PARC GUËLL'이라는 간판을 봤어요. K 대신 C라니! 그냥 그 C 하나가 주는 시각적 안정감이 엄청났습니다. 떼굴떼굴 구르는 것 같고, 잔잔한 파도 같고, 모나지 않았을 때 제 마음 같았어요. '저걸 언젠가 한번은 뭘로든 꼭 써먹어야겠다.' 다짐 했고요, 중간에 사진책 혹은 잡지가 될 뻔한 적도 있었습니다만, 역시 저였으니까 또 묵혔습니다. 12년 동안이나요.
마침 지민이도 서점을 열면 거기에 베를린에서 자기가 좋아했던 공원의 이름을 붙일 예정이었다고 하니, 일이 뭐가 되려면 이런 식인거지요. 우리는 구엘공원에서, 혹은 쎈트럴 파크에서 햇살 좋은 날 아무렇게나 늘어져 먹는 점심, 혹은 저녁을 상상했습니다. 딱 그느낌 그대로를 743-1번지에 심어주고 싶었어요.
[태국]
왜 태국에서 첫 미팅을 했냐면요, 제가 최근까지 거기에 살았었고, 인생의 방향을 바꿀만큼 큰 영향을 받은 곳이니 나에게 직접적으로 자극을 준 곳들을 지민이와 같이 다녀보면 우리가 앞으로 협업의 방향을 맞춰 가기가 수월해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태국은 연중 손님을 많이 치르는 국가이므로 손님 접대하는 호스피털리티 문화가 일상에 녹아있고, 자기네 음식을 내용물이 뭐가 됐든 누가 봐도 맛있어 보이게 내는 능력이 탁월합니다. 그리고 태국은 외세의 침략을 받지 않고 자신들의 문화적 줏대를 지켜온 곳이라 음식문화에 그 고유성이 완벽하게 살아서 이어져 오고 있는 곳이니까요. 무엇이든 윽박지름 당해서 억지로 끼워 넣는 것 말고 내가 주인이 되어 원하는 것만 취할 수 있어야 진짜 내 것이 되죠.
남한을 떠나 전통을 자연스럽게 이으며 살고있는 나라들로 여행을 하면서 저는 우리의 역사 때문에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침략을 당하고 억지로 일본 이름을 만들고, 칼을 찬 교사들이 가르치는 남의 것을 싫은데도 머리 속에 끼워 넣어야 했던 우리 할머니할아버지들이 하루하루 자기 삶의 주인으로서 매끼니를 인간답게 챙길 수 있었을까요? 전 국민이 눈치밥을 37년 동안이나 먹고도 해방되고 나서는 3년 동안 전 국토 하늘에서 폭탄비가 소나기 처럼 내리고, 땅에서는 같은 말을 쓰는 사람들이 찔러 죽이고 쏴죽이는 와중에 온가족을 다 데리고 피난 다니며 살아 남아야 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이 글을 읽을 수 있는 우리는 참 굉장한 생존자들의 후손들입니다. 생존이 가장 중요한 문제인데, 밥상 위에 고려 청자 조선 백자가 부질 없었겠지요. 스뎅이던 푸라스틱이던 안깨지는 것으로 얼른 챙겨먹고 도망가야 하니까, 혹은 일하러 가야 하니까 빨리빨리.
저는 근대 남한의 식문화는 과거와 거의 완벽하게 동떨어진 섬이라고 봅니다. 저 와중에 조선 할머니들 차분한 일상의 레시피며 공들여 쌓아 올린 밥상 문화가 과연 얼만큼이나 우리 대한민국 부모님들께 전해 졌을까요? 반면에 가슴 아프게도 피난길 문화는 대부분의 '한식당' 밥상 위에 고스란히 남았죠. 멜라민 그릇에 담은 음식은 함석 쟁반과 함께 손님들 머리 위로 날아 다니고, 식당 밥상 위에 오른 반찬들은 대부분 빨갛고 짠 절인 음식들입니다. 간이 그렇게 센데 그 아래 재료 고유의 맛은 왠만한 소믈리에가 아니라면 추리 하기도 어렵죠.
우리나라와 2281마일 떨어진 태국에서 저는 우리가 원래 하고 살았을 먹고 사는 스타일을 상상했습니다. 대금 거문고 가야금이 엔터테인먼트였던 분들이 점심식사를 어떻게 하셨을까요? 저녁식사는요? 태국은 길거리 식당에서 천원짜리 볶음밥을 시켜도 그 곁에 장식적인 '가니시'가 붙습니다. 대체로 비슷하지만 스타일도 지역마다 집집마다 다 달라요. 오이 당근은 꼭 둘레를 모양 내서 깎고요. 그런 마음가짐 말입니다.
문화적 유산이 화려하고 풍부한 태국에 사는 현대 서울사람으로서 저는 특히 숭례문과 광화문 새로 짓는 것을 목격하게 된 이후- 과거와 저장장치 '포맷'으로 단절된 것이 오히려 득이 될 수도 있다는 밝은 면을 보기로 했습니다. 뭐든 내가 만들어 내면 그것이 바로 앞으로 '한국적'인 것, 서울적인 것이 될 거라고 믿게 됐어요.
나는 그렇게 태국에서 앞으로도 한국사람으로서 살아갈 새로운 방향감각을 만들었습니다.
[오늘 점심상]
1. 론돈 네셔널 포트레잇 갤러리 <루프탑> 레스토랑, 뉴욝 뉴 갤러리 까페 <사바스키>, 스톡홀름 왕립 코인 캐비넷 <민트크로겐> 레스토랑, 방콕 짐톰슨 뮤지엄 <짐톰슨> 레스토랑. 여행을 자주 하는 사람은 매번 자신만을 위한 새로운 프로그램들을 만들어 줘야 합니다. 그래야 내용이 촘촘해지거니와 계속 여행을 이어 나가고 싶게 되거든요. 저는 그 도시의 뛰어난 뮤지엄/갤러리 식당/까페의 점심식사 시간에 가보는 것을 제 여행의 필수요소로 삼았습니다.
거기라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제 기준에 '잘하고 있는 곳'들은 대체로 지역의 재료와 레시피를 활용한 요리들을 자신들의 캐릭터를 가미해 펼쳐 냅니다. 메뉴만 딱 봐도, 아 이건 접근 방식이 다른갑다 하게 돼요.
2E에 갔다가 리움 미술관에 들렀을 때, 저는 그런 맥락에서 무척 기대를 많이 했습니다.
'이분들은 어떤 점심을 낼까?'
...없다니요?
거기에는 음식 하는 데가 없더라고요. 유럽 뮤지엄들은 수익 증대를 위해서 레스토랑 비즈니스에 더 많은 투자를 하는 추세라고 하는데, 워낙 비즈니스를 하는 회사가 만든 뮤지엄에 업계의 최신 핵심 수익사업이 빠졌다는 것은 의외였습니다.
"그럼 내가 하면 되겠네." -지민이한테 제안을 하기 전에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2. 'Plat du Jour'- 2009년 나난과의 프랑스 여행 필수요소는 바로 이 'Plat du Jour'였습니다. 우리말로 하면 '오늘 점심상'- 유명 레스토랑, 까페, 심지어 몇몇 바까지 점심때 기존 가격보다 저렴한 가격에 그날그날 자신들이 선정한 메뉴들을 내는 것을 뜻합니다. 주로 메인을 육류/생선 중에 선택하게 돼있고, (어떤 데는 채식 메인을 고를 수 있기도 하고요) 전식/디저트를 더하고 빼서 2코스나 3코스로 점심을 즐길 수 있습니다. '코스'다 보니 10분 안에 점심을 후딱 먹기란 존재적으로 불가능 하고요. 약 2주간 거의 날마다 다른 식당들의 점심상을 받다 보니까 '이건 한식이랑도 잘 맞겠는데? 이런 한식 점심도 재밌겠다.'는 게 왔어요.
기존 한식당들 운영 체계는 소수자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선택권에 있어서 제한적입니다. 육류를 먹지 않고 해산물과 채소를 좋아하는 저는 친구들과 한식당에 갔다가 곤란을 겪은 적이 수두룩 합니다.
'김치찌개에서(, 김밥에서, 비빔냉면 고명 중에서) 고기 빼주세요.'하면 '응' 하고 고기를 넣어갖고 오죠. 그래서 '아, 빼달라고 했는데.' 그러면 '아, 총각이 고기도 못 먹는걸 어따 써먹어? 그냥 빼고 먹어.' 친절한 '이모'들은 집게를 푹푹 담가 직접 골라서 빼주기도 하시고요. 쏘 스윗.
그래서 빠르크에는 채소/해산물/육류를 완벽하게 분리한 메뉴 체계를 만들었습니다. 더덕구이와 오징어 볶음, 홍합볶음 등 양념으로 맛을 내는 요리들은 '매운맛(고춧가루 양념) / 순한맛(간장 양념)'도 선택할 수 있게 했습니다. 이것은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빠르크 음식에 부담없이 다가올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외국에서 오신 손님들과 어린아이를 동반한 가족 손님들, 전날의 숙취로 속에 자극적인 것을 피하고 싶어하는 손님들이 특히 반겨 주셨습니다.
-국은 해산물 베이스,
-각 카테고리 별로 날마다(2주간 프리뷰를 해보고 이틀에 한번씩 바꾸는 것으로 수정했습니다) 한가지씩 달라지는 음식을 선보이자!
-거기에 우리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계절에 맞는 반찬을 딱 세가지만 날마다 새롭게 만들어 곁들이자!
-이 아이디어는 요식업에 대한 경험이 전무한 사장 둘이, 군대를 갓 제대한 앳된 요리사 둘과 함께 연 식당이 개점 초기에도 큰 문제를 겪지 않게 해준 효과만점 완충 장치가 되어 주기도 했습니다.
$9 Lunch at Parc
[유태희&홍진영]
빠르크 개점 초기에 저 흰 가림막 뒤에서 저희 엄마가 음식을 하고 있은 줄 아신 분들이 꽤 많이 계신데요, 아닙니다. 한남동 빠르크에서 엄마는 단 한번도 영업시간 중에 주방에 들어가신 적이 없어요. 빠르크의 영문 슬로건은 'Korean Mother's Recipes & More', 여기서 중요한 것은 'More'의 존재입니다.
'엄마의 레시피를 아들 세대가 배워서 이어 나간다.' -이게 빠르크의 진정한 가치입니다.
유태희와 홍진영은 우리가 저 가치의 기초를 세우고, 빠르크를 개점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준 재능만점 젊은 요리사들입니다. 군 선후임 사이인 그들은 전생에 과연 어떤 사이였을까 할 정도로 서로에 대한 신뢰와 우애가 깊습니다.
평생 요식업을 해오신 분들께도 새 식당을 여는 작업은 어렵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빠르크는 완벽한 0으로 시작 했습니다.
-기존 레시피 0
-레스토랑 경영 경험 0
-시스템 0
순전히 엄마 음식 솜씨만 믿고, 될 것 같다는 느낌만 믿고 시작한 거에요. 엄마는 이 계획을 이야기 했더니 지난 십수년간 '야, 다 엄마 음식 맛있다고 난리야, 아줌마들이. 엄마가 식당만 차리면 엄청 잘 될걸?'하던 자신감은 어디로 가고 저를 피해 도망 다니기 시작했어요. 음식에 자신은 있었지만 막상 자기 음식을 세상 사람들 앞에 공개하여 평가를 받게 된다고 생각하니 두려웠나봐요.
두달 동안 간신히간신히 엄마를 설득해서 첫 전수가 시작 됐습니다.
허여사 & 태희
일단 엄마가 평소 하던대로 불고기를 하면, 모든 재료와 중간중간 첨가하는 재료들의 양까지 태희와 진영이가 정확하게 계량하여 기록했습니다. 각 단계별 조리 시간은 물론, 절임류의 경우에는 절쿠는 시간까지 최대한 정확하게 기록 했어요. 이후 관리법, 휘저어 주는 타이밍들도 추가적으로 기록해 나갔습니다. 이 작업은 개점 전 6개월간 집중적으로 실행했고, 개점 이후에도 계절에 따라 새로운 재료가 나와 새로운 반찬으로 재탄생 할때마다 이루어 졌습니다. 물론 지금도 진행중이고요.
태희와 진영이는 20대 초반 젊은이들에 대한 사회의 선입견을 까부술만큼 천성적인 장인의 면모를 지녔습니다. 이들은 주방에 대한 이해도가 거의 전무한 사장들의 아이디어를 듣고도 둘의 능력으로 빠르크의 주방 전체를 0에서 부터 디자인하고 구성했으며, 우리 엄마가 가르쳐 준 것들을 표준 레시피화 하여- 그대로 따라가면 음식이 될 수 있도록 조리 시스템을 확립해 주었습니다. 그대로 했는데도 신기하게 그들이 만든 음식들에는 그들만큼 젊은 분위기와 에너지가 살아 있었습니다. 한창 놀 나이고, 둘 다 멀쩡하게 생겨서 놀 쾌도 엄청 많았을텐데 이들은 함께 일하는 일년 반 동안 단 한번도 지각이나 결석을 하지 않았습니다.
태희와 진영이는 노동 문제에 대한 저와 지민이에 대한 시각도 열어 주었습니다. 빠르크는 이친구들의 요구에 맞춰서 사업초기 사장 둘, 직원 셋일 때부터 4대 보험 및 노무사에게 의뢰해 제작한 근로 계약서를 첫 정식 출근 날짜로부터 보장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이 둘을 만난건 하늘이 주신 축복이었습니다. 지금은 둘 다 빠르크에서 일하며 깨달은 바가 있어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유태희, 홍진영. 앞으로 크게 될 이름들이므로 기억해 두세요.
[디자인]
구엘 공원의 뜨거운 햇살, 각 없이 곡선으로만 둥글둥글, 캘리포니안 아르데코-아르누보, 나무, 흙, 인디고 블루, 벽돌, 흰색, 친구네 집, 째즈 뮤직(스윙&빅밴드, 어메리칸 클래식, 비밥, 보사노바), 캐쥬얼 하지만 예의 바름, 웃는 얼굴, 밝은 에너지...
빠르크 준비 하면서 저희가 브레인 스토밍 한 단어들인데요, 빠르크 오시면 이중에 얼만큼이 느껴 지시나요?
아, 좋아.
빠르크의 로고는 설명하면 입만 아픈 서울 최정상 디자이너, 엘리펀트 김원선 형이 직접 만들어 줬습니다. 원선이 형은 빠르크 천장에 붙은 아르누보 타일들과 창문쪽 방 거울벽도 손수 설치해주었습니다. 빠르크의 조명은 2E와 연결이 되는 디자인으로 선정했고요, 하늘색 전선과 진공관형 전구도 원선이 형이 미국에서 주문해주었습니다.
[공사]
38년 된 벽돌집은 어찌나 예민하던지 여기를 뜯으면 저기가 샜습니다. 마음은 급하고, 공사비는 수비 뚫린 월드컵 대표팀 골 먹듯이 늘어만 났습니다. 인테리어 전반을 저희가 직접 하다 보니 이거 하나를 다 해놓았는데 아이고 그게 빠져서 다 뜯고 처음부터 다시 하는 일들이 비일비재 했습니다. 그것도 한겨울에요.
"계획이 있이 해야지 계획이." -우리 목수 사장님 말씀입니다.
당초 두달 안에 하려던 공사는 해를 넘겨 무려 여섯달이 걸렸습니다. 공사 해주시던 사장님들께서 진심으로 걱정해주실 정도였습니다. 공사가 길어지니 중간중간에 세웠던 목표치들도 흐지부지 돼버리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도대체 이것을 어디로 어떻게 끌고 나가야만 식당이 되는 걸까. 저는 분명히 눈을 뜨고 걷는데도 어디로 가는 건지가 애매한, 앞이 뿌연 안개 속에 서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