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표 양념꼬막
<앙>을 봤다.
-빠르크 관련 인터뷰 하면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
"어머니께서 참 자랑스러워하시겠어요?"다.
아닌데.
엄마는 내가 4년제 대학 사회학부에 갔다가 휴학하고 놀다가
예술학교 사진과에 다시 들어갔을 때 정말 기뻐했었다.
VJ를 할때도 '그만 좀 놀아라.' 했지만 내가 내 작업으로 인정받고 외국에도 가고 그러니까 좋아했었다.
주변에 자랑하는 것도 몇번 봤다.
-영국의 건축가인 '쏘피 힉스' 씨가 지난 5월 부터 '아크네' 매장 건축 건으로 서울에 오가시면서 빠르크에 네번 오셨다.
그는 낯선 도시에서 허기지고 호기심 많은 여행자로서 내가 했던 그대로,
빠르크가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 했던 그대로 빠르크를 즐겼다.
혼자서도 오고, 동료와도 오고, 서울을 떠나기 바로 전날 저녁에는 두 딸과 함께 오셨다. 오실 때 마다 메뉴에 있는 음식들을 돌아가며 주문했고, 늘 하우스 와인을 추가했다.
자주 보게 되니까 안부를 묻고 서울에서의 작업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게 됐는데, 그녀는 마지막 밤에 내게 직접 'This is my favourite restaurant in Seoul.'이라는 말을 남겼다.
짜릿했다.
그날 난 미뤄뒀던 거액의 세금을 내고 너덜너덜해져 있었는데, 저 한마디가 존재에 위로가 됐다.
이 일은 나로 하여금 내가 왜 전공도 아닌 식당을 해보겠다고 마음 먹었는지를 되새겨보게 했다.
나는 빠르크를 열면서 이곳에 내가 낯선 곳에 여행을 갔던 때, 외국에 나가 살던 때 세번 이상 갔던 식당들의 분위기와 정신을 담아내고 싶었다.
길을 걷다 어쩐지 뭔가 좋아보여 들어가고,
음식을 주문하며 거기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 눈과 몸동작, 매너를 보고,
하우스 와인 한잔, 그지역 술을 한잔 시켜서 홀짝 거리다가
음식 맛을 보고, 거기에 모인 다른 사람들 먹는 모습을 보고.
여기에 누구랑 또 오면 좋을지를 생각해뒀다가
마음에 드는 곳들에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같이 그 도시에 가면 꼭 일부러 찾아갔다.
내가 못가면 친구들에게 약도를 그려 주기도 했다.
일단 그런 식당들에 가면 식당 식구들에게 그간 잘 있었는지, 일하던 사람들은 그대로인지, 뭐가 달라졌는지 안부를 묻고.
그 다음에는 내가 그 식당에서 좋았던 것들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대신 주문해주고, 다같이 맛있는 것을 나눠먹고 마시고 취하는 행복을 즐겼다.
마지막에 식당 주인, 혹은 요리사를 찾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찬사를 남기는 것도 빠트리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식당이 몇년 뒤에 가더라도 거기서 잘 하고 있다는 것이 갈급한 자발적 이방인에게 위로가 됐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사실 타이베이에는 사랑에 빠져서 갔었다.
친구들한테랑 집에는 그럴싸하게 중국어를 배우러 간다고 둘러댔다.
관계는 너무 일찍 파국을 맞았고, 습하고 낯선 도시에서 나는 깊고 지독한 우울에 빠져 들었다.
밖에만 나가면 안좋은 일이 생겼다.
잘 살던 내 인생에 갑자기 흡혈박쥐 떼가 나타나 내 앞에 높은 벽을 만들고 몇마리씩 내게 달려들어 나를 물어 뜯으며 곧 닥칠 초거대한 불운에 대해 경고하는 것 같았다.
밤에 아무도 없는 낯선 길에서 분무기 물처럼 날리는 비를 맞으면서 허공에 늑대처럼 소리를 지르며 울기도 하고
침대에 힘이 하나 없이 누워서 멍하게 울기도 하고
원나잇 펀을 찾아 나섰다가 더 알 수 없는 심정이 되어 퀭한 눈을 하고 집으로 걷기도 했다.
그러다가 소매치기를 당해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급히 서울에 온적이 있다.
집에.
엄마가 나를 보더니, 정말 아무것도 묻지도 않고
'아이, 새끼 집에 먹을 것도 없는데.' 하더니
새송이 버섯전이랑 잡채 등 뚝딱 반찬 여섯개를 놓고 밥상을 차려 줬었다. 울컥.
그 밥을 먹으니까 나을 것 같았다.
'언제 나는 나가서 아들 자랑 좀 해보냐?'를 입에 달고 살지만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죽상인데 너 타이베이 가서 일도 안하고 뭐하고 자빠졌냐, 요즘 무슨 일 있냐 솔직히 얘기해봐라 꼬치꼬치 따지지 않고 그냥 밥을 차려주는 사람이 바로 우리 엄마였다.
엄마는 내가 살면서 지칠 때마다 엄마가 가장 잘하는 것으로 그렇게 나를 위로했다.
<앙>을 보면서 앞으로 빠르크에 무엇을 더 담아야 할지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