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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g's 2011

나의 2011 [1]

올해 저는 서른이 되었습니다. (따지지 마세요. 한국 나이는 개 줬습니다.)
서울에서라면 서른이라는 무게가 상당하죠. 차도 한대 있어야 하고, 보험도 몇개 있어야 하고, 펀드? 뭐 이런 것도 알아야 하고, 집도 있어야 하고. 저는 스물 다섯쯤에 '이런식으로 돈 벌면 서른엔 집도 사겠다.' 했었는데요, 서른이 된 지금 저는 아직도 가족카드 들고 다니면서 여기서 긁고 저기서 긁습니다. 스무살의 제가 지금의 저를 보면 루저라고 할 것이 분명하지만, 꼬추가 탱탱 할 때 더 놀아야죠.

사실 엄마한테는 이것저것 조금씩 일도 하고 있다고 뻥은 쳤습니다만...
일은 하나도 안하고 놀기만 했군요.

올해 저는 2012에 정말 지구가 포맷 될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여행을 많이 했고, 친구들을 다른 친구들에게 소개 시켜주고, 많이 먹었고, 많이 마셨습니다. 내년에 지구가 안망하면 저로서는 좀 곤란해요. 집 기둥을 하나 갖다 뽑았거든요. 오직 저의 하느님- 엄마아빠의 예금으로 마음 내키는대로 다녔습니다.

오늘 문득 아이포토를 열었다가 무려 30기가, 일만오천봉의 사진이 있는 것을 알고 나니 자랑이 하고 싶어 손가락이 근질근질 해서 참을 수가 없더군요.
그래서 숙취 중에도 맥북 앞에 앉았습니다.

보세요, 저의 아름다운 2011.

2011은 방콕의 짜오프라야 강 위에서 맞았습니다.


2010년에 저는 방콕에서 제이 몬톤, 조니 안와라는 두명의 뮤지션과 '프라짜우쫃'이라는 팀을 만들어 6만석 규모의 국립 라차망갈라 경기장에서 VJ 복귀 무대를 가졌었습니다. 그때 그 인연으로 조니의 새해맞이 선상파티에 초대를 받아 가게 됐어요. 방콕 셀렙들 중에는 이렇게 배를 빌려 배 위에서 새해맞이 파티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 앞에 배를 세우고 대규모 불꽃놀이를 구경한 뒤 짜오프라야 강을 오르락 내리락 합니다. 그러면서 계속 먹고 마시고 춤 추고 얘기 했어요. 한겨울 밤기온이 20도 안팎인 방콕에서 누릴 수 있는 특별한 호사죠.

아름다운 두 여인과 함께요.


우리 모두 최고의 한해를 보낼 것만 같이 완벽한 파티였어요.
정말 완벽 했는데, 우리 이영진이가 아이폰을 택시에 두고 내렸죠. ㅠㅠ

씨킴보이 베론


이 친구는 제가 근래 본 꼬마들 중에 가장 영특한 꼬마 중의 하나였어요. 2010 새해를 맞으러 간 인도 고아에서 만날 갔던 바 주인의 아들인데요, 이 가족은 인도 북부 씨킴이라는 굉장한 동네에서 고아에 씨즌 장사를 하러 내려와 있었습니다. 저와 동행했던 태국친구 옹, 뭄바이에서 고아 가는 버스에서 만나 룸메이트로 열흘이나 함께 지낸 스웨디시 히피 청년 욘(기억해 두세요)이랑 만날 갔으니까 상당히 친해 졌었고, 여러모로 도움도 많이 받았어요. 그러다가 그 가족은 큰 실수를 하게 되는데 절더러 '너 씨킴에 꼭 놀러와라' 한겁니다.

저 꽤 무서운 사람이에요.
초대를 받으면 갑니다.

그래서 원래 2주만 있기로 한 인도에서 한달이 넘게 있으면서요, 계획에도 없었던 (어차피 계획이란 거 없는 여행이었지만) 씨킴까지 정말로 올라가게 됩니다. 씨킴은 샹그릴라 같은 곳이었어요. 저같이 생긴 분들이 위대한 캉첸중가를 날마다 보면서 품위있게 살아 갑니다. 베론네는 씨킴이 왕국이었을때 왕실 고위직으로 일하던 베론 외할아버지가 당시 왕에게 하사받은 '로열' 하우스에 저와 친구들을 초대해서 구경도 시켜 줬구요, 저희를 데리고 낚시도 가줬습니다. 집으로 초대해 씨킴식 가정식을 한상 차려 주기도 했고요. 

이런 멋진 경험을 선물해준 분들이 방콕에 오셨다니 저는 강아지 마냥 튀어 나갔습니다. 하루를 이 가족들과 보내고 밤이 됐을 때- 저는 전날 밤에 타이베이에 비자 갱신을 하러 가려고 티켓을 알아 보다가 엄청나게 싼 가격에 충동구매 해버린, '오슬로'행 비행기를 타게 됩니다.

*서른이 되었으니 저에게 뭔가 특별한 선물을 해주고 싶었고, 통장에는 무려 2007년에 뉴욕에 가서 일해서 받은 보너스가 두둑히 들어와 있었고 (이래서 일은 확실한 분들이랑 해야 해요), 여름나라에 살면서 겨울이 좀 그립기도 했고, (신기하게 태국에 2년 반 살아도 가을 되면 가을 타고요, 겨울되면 뜨거운 온천에 몸 담그고 싶고 그렇더라고요.) 그래서 오슬로라는 이름을 본 순간 정신줄을 놓아 버린거죠.

네, 가도 좀 너무 멀리 갔습니다. 

보딩 게이트가 하필...


이때 저 게이트 넘버를 보고 저는 잠시 정신을 차리게 됩니다.
올해가 되고, 아니 어제 아침만 해도 오늘 밤에 노르웨이에 갈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거든요.
내가 지금 나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가?

파이널 콜 보이시죠?
저는 공항을 일찍 가건 늦게 가건 꼭 저걸 보고 마는 병이 있어요.
 

노르웨이의 숲


저는 제가 이런 짓거리 할 때마다 좀 무서운데요, 저런 느닷없는 결정을 할 땐 참 앞뒤를 전혀 재지 않거든요. 실제로 저한테는 두꺼운 옷도 하나도 없었어요. 떠나던 날 방콕날씨 영상 30도. 노르웨이 도착하니까 영하 *13도가 조금 넘데요.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누구처럼 살색 몽고메리 속옷 입고요, 있는 옷이란 옷은 다 껴입었습니다. 그래도 무지무지 춥더군요. 막 쪼그라들어서 잠시 무성인간이 되기도 했습니다. 부끄부끄 이모티콘.

거기다 저는 거기를 원웨이 티켓으로 간 거였어요.

아스크 무나 토마스


오슬로 30만원, 이 가격을 그것도 타이항공 홈페이지에서 발견하고 저는 오슬로? 오슬로에 누가 있더라? 잠시 생각을 해보니 얘네들이 있더라구요. 2010년에 말레이시아 내려 갔을때 게스트 하우스에서 만나서 단 하룻밤 같이 나가서 놀았던 요녀석들이요. 하필 제 생일에 이친구들이 '생일 축하해. 노르웨이는 언제 올거야?' 한 게 생각이 났건 거시기.

진짜로 갔더니 이친구들 저를 너무너무 반갑게 맞아 줍니다. 저 하나로 자기들 아시아 여행했던 기억들이 다시 살아 났다며 신이 났어요. 얘네들이 첫날부터 저를 위해 토마스네 아버지 곳간을 털어 하루종일 요리를 해줬습니다. 무진장 먹었습니다. 노르웨이에 왔으면 이거는 꼭 먹어야 한다고 해서 원래는 먹지 않는 양고기까지 먹었습니다. 핀너싯이라고요 크리스마스에 주로 먹는 명절음식이라는군요.

아실랑가 모르겠지만 노르웨이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이건 정말 살인적이라고 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엄청난 물가를 자랑합니다. 아마 이친구들이 아니었으면 저는 거기서 일주일도 못 있었을 거에요. 자판기에서 파는 탄산수 한병이 4800원 정도 하니까요. 담배는 열개피 들이가 만원, 스무개피 일반 팩은 2만원 되겠어요. 금연 여행으로 가기에 딱 좋은 곳이죠.

난생 처음 스노보드를 탔습니다.


눈의 왕국 노르웨이는 기가 탁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더군요. 겨울을 겨울답게 보내고 싶으면 전재산을 탕진하는 한이 있더라도 노르웨이에 한번쯤은 가보세요. 특히 스노보드를 배우기에 저만한 곳이 세상에 또 있을까 했습니다. 눈이 계속 내리기 때문에 아무리 구르고 자빠져도 별로 아프지가 않습니다. 외려 기분이 참 좋아요. 친구들은 저를 처음부터 중급자 코스로 끌고 갔는데요, 서서 미끄러져 내려온 시간보다 뒹굴뒹굴한 시간이 더 길었습니다 당연히. 그래도 아프지 않았으니까. 나이 서른에 참, 처음 눈밭에 나간 애 마냥 신나서 어두워질 때까지 놀았어요.

*보드복에 헬멧에 보드며 부츠며 뭐 이런 것들은 친구들이 빌려 줬어요. 노르웨이 사람들은 집에 보드며 스키 장비를 일인당 두세트씩은 기본적으로 갖고 있더라고요. 크로스컨트리로 출퇴근 하는 사람들도 많고요, 아장아장 꼬꼬마들도 스키를 기가 막히게 탑디다. 거기에선 동계 스포츠가 4년에 한번 동계 올림픽 때만 TV에서나 보는 그런게 아니라 그냥 생활의 한 부분이더라고요. 누구나 뭐든지 하나는 하고 있습니다. TV에서 스키점프, 크로스컨트리 대회 이런것들을 만날 중계해 주는데요, 그게 또 시청률도 그렇게 높다는군요.

아, 노르웨이에 보드 타러 가실 분들은 자기 장비 꼭 다 챙겨 가세요. 뭐 하나 빌리려면 무지무지 비쌉니다. 진짜임.
(이곳의 리프트 세시간권은 350NOK=₩66,000. 헬멧과 보드도 같이 빌리면 700NOK.)

친절한 빅터씨


저는 아스크 무나 토마스네 집들에서 번갈아 가면서 지냈어요. 하루는 아스크가 클럽에서 어떤 아가씨랑 눈이 맞는 바람에 저는 좀 난감한 상황을 맞게 되는데요, 그 상황에 옆에 있던 이 빅터가 그럼 자기네서 자고 가라며 선뜻 저를 구원해 줬습니다.

빅터네는 이렇게 눈쌓인 경마장을 가로질러 가는데요, 걷고 있는데 자꾸 내가 지금 꿈을 꾸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파파 G!


토마스네 아버지 파파G에요.
토마스는 무나랑 집을 구해서 막 독립을 했는데요, 그때문에 집이 정리가 안되어 저는 소파에서 대충 자야 했습니다. 그것도 충분히 고맙고 하나도 안 불편했는데 얘네는 저를 갖다가 넓고 멋진 자기 아버지 집에다 이사를 시킵니다.

파파G는 저랑 쿵짝이 잘 맞아서요, 우리는 참 친해 졌습니다.
먹는 거 좋아하고, 와인 좋아하고, (파파G는 마음에 드는 와인이 나타나면 온 오슬로를 다 뒤져서 그 와인들을 싹쓸이 해오는데요, 그 때문에 그의 지하 주류 보관소는 진정한 보물창고입니다.) 요리도 좋아 하고요. 무엇보다 젊은 시절에 여행을 많이 다니셔서 저랑 할 얘기가 참 많았어요.

제 유머코드를 참 좋아 하셨던 파파G는 와인도 좋은걸로 여러병 따주셨습니다. 디캔팅도 착실하게.

올해 먹은 숲 중에 아직도 최고!


파파G는 제가 오슬로에 있는 한달 동안 두번이나 요리를 해주셨는데요, 그분은 일단 손이 크셔서 뭐든지 엄청난 양을 만드십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식재료란 식재료를 주방에 다 갖추고 계세요. 그것들을 자유자재로 활용하여 독특한 결과물을 만들어 내시더군요.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먹어본 음식들 중에서 자기가 좋았던 맛들을 조합해 만든다고 하시데요.

설명 필요 합니까?


네. 뭉크씨도 노르웨이 사람이었어요.
뭉크 뮤지엄에 가보면 뭉크씨가 그린 셀프 포트레잇이 참 다양한 버젼으로 걸려 있는데요, 과연 시대를 앞서간 셀카 달인이십디다.

멋지죠? 노르웨이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퇸스버그의 하루가 저물고 있습니다.


노르웨이는 물가가 비싸지만 그만큼 임금도 높습니다. 맥도날드 같은데서 파트타임으로 일을 해도 한달에 "최저임금" '270만원' 정도를 벌 수가 있어요. 그래서 스웨덴 젊은이들이 노르웨이에 일 하러 많이 가 있습니다.

저는 고아에서 만난 제 스웨디시 친구 욘이 노르웨이 남쪽의 아름다운 도시 '퇸스버그'라는 곳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갔죠 그래서.
 

욘 동생 차는 캐간지 각볼보. 볼보는 각볼보죠.


마침 욘은 스톡홀름으로 돌아갈 참이었고요, 욘 동생이 이렇게 차를 몰고 욘을 픽업하러 와서 우리는 함께 눈길을 일곱시간을 달렸어요.
노르웨이 입국 할 때는 제가 편도 티켓을 끊어간 바람에 입국 심사가 좀 복잡했었는데요, 노르웨이 스웨덴 국경에는 그냥 '스웨덴' 표지판만 딸랑 있습니다. 아무런 입국절차가 없어요. 우리같은 섬나라 사람들에게는 이거 참 신기한 경험입니다.

우월한 기럭지, 욘


욘은 참 재밌고 따뜻한 친구입니다. 인도 여행을 거의 일년 가까이 하면서 배낭도 작은거 딱 하나 였고요, 속옷도 없고 딱 생존에 필요한 필수품만 갖고 여행을 하더라고요. 히치 하이킹만으로 그루지아에서 터키까지도 여행 했대요. 처음 고아에서 만났을땐 정말 '요즘도 이런 히피들이 있나?' 할 정도의 완벽한 히피룩이었는데요, 스톡홀름에서는 이렇게 모단뽀이였어요. 심지어 그가 사는 동네도 저렇게 모던한 스톡홀름의 신도시 지역이었습니다.

욘은 제게 자기 침대를 내주고 거실에서 일주일 동안이나 지냈어요. 참 따뜻한 가족들과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며 좋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스웨덴 왕립 오페라


다양한 관심사를 가진 욘의 아버지께서 스웨덴 왕립 발레단이 헨델의 메시아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공연을 사상 처음으로 공연 한다고 하셔서 보러 갔습니다. 할렐루야를 라이브로 들으니까 눈물이 그냥 왈칵 쏟아 지데요. 다른 관객들과 함께 오랫동안 서서 박수를 쳤습니다. 공연장 끝내 주더군요. 북구의 영광과 호사로움이 쩌렁쩌렁 빛나고 있더이다.

그냥 지하철 역이 이래요.


스웨덴은 풍경도 사람들도 참 안구정화 되는 풍요로운 곳이더군요.
그냥 일상이 화보인 사람들이 인구대비 '너무' 많아요.

노벨 박물관에 가보며는요,


우리나라에서 노벨상을 받은 단 한분, 돌아가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옥중 서한을 만나게 됩니다.
저는 저 앞에다 코를 박고 그분의 편지를 다 읽었는데요, 정치적인 견해차가 있겠지만, 한글을 읽을 수 있는 분이라면 저 분이 쓴 편지들을 읽어 보시면 저 분이 얼마나 생각을 많이 하신 분인지를 알게 되실 겁니다. 일반인이 아니에요 저분은. 옥중에서 자기 아내에게 민주주의에 대해 쓴 생각을 써서 편지를 보낸다니요. 그것도 자기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말입니다. 추신에는 누구의 어떤책들을 보내 달라, 이런 내용들이 적혀 있습니다.

우리가 '자유민주주의'의 꿀맛을 볼 수 있었던 것이 그냥 저절로 된 것이 아니더란 말입니다.
저런 분들이 목숨을 걸고 이룩한 소중한 것을 우리 쉽게 놓지 말기로 해요. 공구리 이제 지겹지 않아요?

음력 새해 아침에 제가 본 풍경이에요.


다시 노르웨이로 돌아간 저는 이번에는 '오로라'를 보겠다며 북쪽으로 올라 갔습니다.
노르웨이 철도의 최북단 도시 '보되'까지 가서 차를 빌렸어요.
그리고 거기서 더 북쪽으로, 북쪽으로 올라 갔습니다. '트롬쇠' 까지요. 숙박비는 차에서 자는 것으로 아끼고 밤새 달렸습니다. 오로라 잡으러요. 어디 가면 있는 김서방을 만나러 간 것도 아니고, 자연 현상을 찾겠다고, 살면서 이런 곳에 오리라고는 상상해 본 적도 없던 곳을 휘젓고 다녔습니다. 사흘 내내 달렸지만 결국 오로라는 보지 못했어요.

다만 이런 '아틱서클' 위의, 어메이징한 북극권 풍경을 보는 것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이정도 아름다운 일출로 음력 아침을 맞고나니 뭐, 아쉬운거 없더라고요.
 

써프라이즈!


대신 이런 친구들이 나타나 저를 깜짝 놀래켜 주었습니다. 트롬쇠 시내에서 만난 젊은 금발 경찰 소년소녀들이 오로라를 보려면 되도록 아무도 없는, 완전히 어두운 곳으로 가라고 해서 정말 저는 '이 도로 끝까지 가면 인간계를 벗어나 엘프계에 들어갈 것 같다' 할 만큼 막 갔습니다. 저 말고는 그 도로에 아무도 없었고요, 지나치는 차도 한대도 없었어요. 그런데에도 뜨문뜨문 집들이 있는 걸 보고 참 세상은 역시 넓고 사람들은 참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 가는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그런데 저쪽에서 시커먼 얘네들이 딱 나타나 길을 막더라고요.
노르웨의의 상징 '무스;말코손바닥사슴' 가족이요.
재네들 실제로 보면 엄청 크더라고요. 토마스한테 얘기 했더니 '너 정말 럭키했다.'고 하더라고요. 저렇게 한 가족을 한꺼번에 보기는 쉽지 않다는군요. 우리나라 도로에 저런 애들이 나타나면 아마... 노 코멘트.

말코손바닥사슴 말코손바닥사슴 말코손바닥사슴
어때요? 기분 좋아지죠? 우울해 질때마다 말코손바닥사슴을 소리 내서 세번씩 말해 보세요.
말코손바닥사슴이 여러분 마음을 위로해 줄겁니다.




허허, 녀석들.


오로라는 다 포기하고 오슬로로 돌아 가는 기차안.
포기하고 가는 길이었지만 그래도 너무 아쉽잖아요. 거기까지 그 고생을 하고 올라 갔는데 오로라도 못보고. 그래서 잠 못들고 계속 창밖을 봤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세상에 마상에 하느님 부처님 알라님 가네시님 이럴수가 이럴수가!
결국은 보고야 말았습니다 Northern Lights 북극의 빛. 그때의 그 심경은 그때 그 트윗을 보도록 해요.

"모두 잠든 야간열차 안을 막 뛰어 다니며 소란을 피웠다. 차창에 얼굴을 바짝 대자 쿵쾅대는 심장이 갈비뼈를 부수고 튀어 나올것 같았다. 입은 아멘을 외치고 있었다. 난 오로라를 봤다.

사진으로 보던것만큼 강한 빛은 아니었지만 분명히 시냇물같은 빛줄기가 하늘위를 흐르고 있었다. 어떤 단어들로 묘사해야 할지 감히 엄두가 안난다. 푸른점, 바로 이곳. '압솔룻' 자주 목격 된다고.
우리들의 집은 넓고 우리 머리 끄댕이를 잡고 송두리째 흔들어 놓을 수 있는 멋진 곳이다. 오로라, 이건 내가 여지껏 하늘에서 본 어떤 현상보다도 아름답고 비현실적인 것이었다. 지구에 사는 주민으로서 우리는 이 별이 주는 이런 영광을 누려야 한다.

참 작위적인 스토리가 되고 말았지만 이게 길이 부리는 마법 아니겠습니까? 제가 그동안 길에서 좋은 카르마를 많이 쌓아둔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여행에도 믿기지 않는 순간들이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

...이렇게 적었었군요. 

오슬로로 내려 가니 파파G가 절더러 밀라노에 친구가 있냐고 물어 보더라고요. 파파G는 이탈리아- 노르웨이간의 물류회사를 운영하고 있는데요, 제가 관심 있으면 자기 트럭에 태워서 저를 밀라노로 보내 주겠다는 거였어요. 세상에. 밀라노가 아니더라도 이탈리아 어디든 가고 싶으면 얘기 하래요.

저는 방콕에 돌아가는 표를 알아보고 있던 중이었는데요, 밀라노에서 출발하는 비행기가 오슬로 출발 보다는 훨씬 싸더라고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밀라노에는 저의 절친들이 둘이나 살고 있으니까요, 저는 예쓰! 했습니다.

파파G는 신이 나서 일정을 잡아 줬습니다. 트럭 운전 기사분들 중에 가장 영어를 잘 하는 폴란드 분이랑 보내 줄테니 사흘 더 기다리라면서요. 파파G는 정말 너무너무 멋진 사장님이라 그냥 일반 화물선에 태워도 되는 트럭들을 호화 크루즈 선박에 태웁니다. 기사분들은 매끼를 크루즈 안의 부페에서 드시고요. 그래서 탑승권에도 형식상 이름을 기재하게 돼있는데요,

아놔!

저 아바이 수령님 됐어요.

급히 티켓을 끊는데 한국 이름이라고는 아는 것이 김일성 밖에 없었답니다.
이걸 보고 얼마나 신이 나서 껄껄 웃으시던지, 저도 무릎을 꿇고 한참 웃었습니다.

한참 웃고보니 약간 씁쓸하기도 한 불편한 진실이기는 하데요. 김일성만큼 유명한 한국 이름이 어딨겠습니까?
우리 더 분발 합시다, 자유대한의 아들딸 여러분. 아자아자 화이팅! 이지랄.

따라~!


바로 이 찹니다. 제가 오슬로를 떠나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거쳐 밀라노 까지 내려갈 트랜스포머 트럭!
멋지죠?

이차에 타게 되면서 제 여행은 또 기약없이 늘어 납니다.


*이거 원래 한 포스팅에 2011 정리 딱 하려고 했는데 좀 아까운 얘기들이 많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