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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PE

타이페이, 동지, 팥죽

곧 한국이 아닌 나라에서 세번째 새해를 맞이하게 되는 저이지만, 한국의 명절에는 가능하면 한국에서 하던 것들을 하려고 합니다.

평소에는 굳이 한국음식을 먹지 않고도 몇날 며칠이고 잘 참아 내지만, 명절에는 명절음식을 먹어 줘야만 한해를 한해답게 보내고 있다는 기분이 나거든요. 방콕에 살때는 동짓날이나 추석에 쑤쿰윗 12에 있는 한국식당들에서 명절음식을 준비해서 손님들에게 후식이나 반찬처럼 주기도 했기 때문에, 명절때는 전화를 해서 확인을 하고 한국식당에서 밥을 먹곤 했어요.

추석이나 설날이 더 큰 명절이기는 하지만, 저는 동지를 가장 좋아하고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바로 팥죽을 먹을수 있으니까요.

저는 단팥이 참말로 좋아요.
팥빙수, 단팥빵, 시루떡, 팥칼국수, 팥으로 만든 거라면 뭐든 남들이 걱정할 때까지 쉬지 않고 먹을 수가 있어요.
그중에서도 팥죽은 단연 으뜸입니다.

짭쪼름한 팥죽 위에 설탕을 한숟가락 원을 만들어 뿌린 뒤에 그것이 녹아 군침 돌게 하는 마법의 시럽 링이 나타나면 죽이랑 새알을 두어알 숟가락에 알차게 떠서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입안에 옴쏙 넣습니다.
고소 짭쫄 달콤 쫀득 담백.

팥죽은 저의 이성을 마비 시키고, 저는 한그릇을 뚝딱 사단 냅니다.

동치미 국물은 일단 한그릇을 다 비운 후에 마셔주는 것이 팥죽에 대한 예의 이지요.
잠시 잘 익은 동치미 무를 사각사각 베어 먹으며 겨울의 아름다움을 음미한 뒤, 한그릇 더 갑니다.
이번엔 설탕은 뿌리지 않고 담백한 맛으로 먹어요.
음... 아 죽갔네. 

타이완 동지 음식 탕유엔


울엄마는 정말 멋쟁이인게 우리 형제가 자라는 동안 중요한 명절 때는 꼭 그 명절에만 할 수 있는 것들을 다 챙겨서 해주셨어요.
설떡국, 추석송편 이런건 뭐 기본이고요.

저희집은 큰집인데다가 저희 할머니 할아버지는 두분 다 겨울에 돌아 가셔서 겨울이 되면 엄마는 최소한 세차례의 거대한 상차림을 준비해야 했는데도요, 식혜같은 손이 많이 가는 귀찮은 음식도 엄마는 꼭 당신 손으로 다 만들었습니다. 제사가 끝나고 나면 저희집 마당 옆 창고에는 늘 커다란 황금 들통이 식혜를 가득 얼려 놓고 있어서 저와 제 동생의 겨울을 한껏 풍성하게 밝혀 주곤 했죠.

팥죽도 그랬습니다.
동지에 끓인 팥죽도 (엄마는 손이 커서 절대로 음식을 한번 먹고 끝날만큼 만들 줄을 모릅니다) 며칠동안 저의 하교 후 간식이 되어 주었죠. 스댕 대접에 한차례 퍼서 찬 거 그대로 먹는 팥죽은 좀 더 겨울의 맛이랄까요?

엄마도 나이가 들면서 이제는 김치도 주문해 먹지만, 동짓날이 되면 꼭 저한테 '팥죽 끓여?' 물어 봤습니다.
응.

아들의 저 한마디에 새알을 빚고 팥을 고르고 긴 시간 불을 지켜가며 팥죽 쑤는 울엄마.
저는 한번도 그것을 도와 줬다거나, 곁에서 지켜봐 준적도 없지만, 글 쓰며 그 광경을 떠올려 보니 이거 움찔하네요. (엄마 보고싶다 유유)

그렇게 팥죽 끓여달라 해놓고 그것도 까맣게 잊은채 친구들이랑 놀러 기어 나가서 엄마 전화 받은 것도 생각 납니다.
"다 됐어 올라와." (저는 4층, 엄마는 5층 살았어요) 
(쿵딱쿵딱 음악소리)"나 나왔는데? 냅둬 들어가서 먹을게."
"야 이새끼야 끓이자마자 먹어야 맛있지."
(쿵딱쿵딱 )"아아아아, 알았어! 들어가서 먹는다고!"
"끊어 개새끼야!"

다음날 아침에 기어 들어가서 숙취에 팅팅 부운 얼굴을 하고 점심쯤에 엄마한테 가면 엄마는 뒤로 돌아 앉아 싸늘하게 삐쳐 있습니다. 얼레벌레 재롱을 떨어서 엄마 기분을 풀어주면 괜찮을 거다 그땐 그렇게 생각 했었는데요, 생각해 보니 참 엄마한테 미안하네예.

울엄마가 끓인 팥죽은 농도가 대단히 깊고요, 새알만 넣어 미니멀리즘을 극대화 한 비쥬얼을 자랑합니다.
한그릇만 딱 먹어도 면역력이 급 강화된 느낌이 온달까요?
당연히 엄마는 자기 팥죽에 대한 프라이드가 이탈리안 마마파파 저리 가라죠.

저 어렸을때 저희집에는 사업이 망하는 바람에 관악산 앞에서 팥죽 장사를 해야 했던 '팥죽 아줌마' 부부가 잠시 살았었는데요, 아주머니는 부산 분이셨고 팥죽에 쌀을 넣는, 저에게는 대단히 새롭고 흥미로운 조리법을 선보여 주셨습니다. 그때는 날마다 팥죽을 냉면 그릇으로 실컷 먹을수 있어서 저 참 행복했어요. 제가 주는대로 팥죽을 낼름낼름 비우니 그 어른들도 저를 참 예뻐해 주셨고요.

하지만 제가 그 아줌마 팥죽을 칭찬 한 것은 엄마의 심기를 크게 건드리고 말았죠.
엄마는 자기 음식에 대한 완고한 룰이 있어서 그것에 벗어나면 음식 맛을 보기도 전에 미간을 확 찌푸리며 강한 반감을 나타내곤 하는데요, 엄마의 미니멀한 팥죽 세계에 밥풀이 한가득인 '팥죽 아줌마'식은 도저히 납득이 안되는 먼 세계였던 것입니다.

그걸 잘 아는 저는 심심해서 가끔 엄마를 골려먹고 싶을때 다른 집에 가서 먹은 음식을 칭찬해 엄마를 도발 합니다.
그럼 한차례 대판 싸우고 저는 뒷통수를 한대 얻어 맞거나 쌍욕을 한바가지 먹는데요, 그거 참 재밌는 저희 가족 나름의 놀이(읭?)였습니다.

하지만 울엄마도 많이 늙어서 이제 제가 도발하면 잘 못 싸우고 막 울어 버릴 때가 많아져서 속상하다.
 

홍또탕 집에 불났네.


타이완에는 팥죽은 아니지만 팥죽과 비슷한 '홍또(단팥)탕'이라는 게 있고요, 팥죽 보다는 묽고 달달한 맛이 납니다. '탕'이라는 이름과 딱 어울리는 맛이에요. 죽은 아니지만 꿩 대신 쓸만한 닭으로 딱입니다. 이거라도 있는게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허허

저 위에 '탕유엔'은 식감이 우리 팥죽에 들어가는 새알과 상당히 비슷합니다.
안에 들은 저것은 달콤한 꿀깨 되겠어요.
동짓날 타이완 사람들은 바로 저 탕유엔을 먹는다고 합니다.
저는 동지에 팥죽은 한국에서만 먹는다는 것을 이번에 처음 알았어요. 일본에서는 동지에 욕조에 유자를 풀어 목욕을 한다고 하네요. 이것도 재밌겠죠?

아무튼 저런 홍또탕 집에서는 홍또탕만 파는 것이 아니고 각종 타이완식 디저트도 함께 내는데요, 그래서 안에 들어가는 것은 여러분 마음대로 골라잡아 할 수가 있어서 참 재밌어요. 

바로 아래 사진처럼요.

고구마 홍또탕!


이것은 위에 있는 두 사진과 같은 집에서 찍은 건데요, 저희 학교 근처 '시다 야시장' 부근에서 가장 인기있는 노점입니다.
한번 가보고 맛있어서 다른 조합으로 또 먹어 보려고 또 갔죠. 전 맛있는 데 한군데를 발견하면 그집 메뉴를 다 먹어 볼 때까지 계속 그집만 가는 버릇이 있어요.

이번에는 옆 손님이 고구마를 홍또탕에 말아서 먹고 있길래 저도 똑같이 해봤는데요, 으아아아아, 나중에 한국에서 팥죽 끓일때 고구마 꼭 넣어야 겠다고 결심 해버렸습니다.
 

타피오카 홍또탕


타이완 사람들은 자기나라 음식, 디저트를 상당히 좋아 하고요, 생활 속에서 즐겨 먹습니다. 그래서 이런 홍또탕 집들도 젊은 컨셉으로 프랜차이즈화 된 곳들이 많이 있습니다. 바로 이 디저트 가게가 그런 곳인데요, 여기는 이렇게 타이완의 위대한 발명품 '버블'이 들어간 '버블 홍또탕'도 내고 있습니다.

생긴대로 아주 귀여운 맛이에요.
쫄깃 쫄깃.
탱글 탱글.

이쪽이 가장 팥죽과 비슷한 색이군요.


제가 사진을 전부 아이폰으로 찍어서 형광등 아래서 찍은 다른 사진들은 탕의 붉기가 제대로 표현이 안된 것 같은데요, 이 사진은 좀 더 팥죽과 비슷한 느낌이죠?

이집은 제 친구네 근처의 유명한 '뚜화'집인데요, 타이완 사람들이 디저트로 주로 먹는 저 부드러운 연두부를 '뚜화'라고 한답니다. 이집 역시 고구마를 깍둑 썰어 넣었군요. 

팥죽 안드셨으면 얼른 검색해 보시고 팥죽맛집 찾아가 보세요. 날이 추울수록 팥죽은 더 맛있더라요.
우와 부럽다, 한국 팥죽 나도 먹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