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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PE

이사 했어요.

오랜만입니다.
갑자기 블로그를 닫고 서울에 다녀온 지도 벌써 한달이 넘었군요.

이런 저런 경로를 통해서 많은 분들이 짐작 하셨겠지만 저는 올해가 시작됨과 동시에 거대한 감정의 동요를 겪었습니다. 제가 또 은근히 힘든 거 있으면 친구들에게도 잘 얘기 안하는 성격이라 대충 그 순간 잘 넘기고 지나 가는데, 이번에는 좀 너무 셌어요. 오죽했으면 일년 반만에 서울에를 갔겠습니까?

'세상에 내가 이렇게 걱정 없이 날마다 행복하게 살아도 되나?'가 유일한 고민이었을 만큼 행복했던 제가 우울함의 늪에 빠져 허우적 거리게 되는데 꼭 두달도 걸리지 않더군요. 우울증은 누구에게나 예고 없이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을 저는 이번에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개개인의 상황과 성격, 라이프 스타일에 맞춰서 제공하는 악마의 '맞춤형 서비스'라고 할까요? 혹시 여러분 주위에 평소와 달리 자꾸 힘들어 하는 분들이 없는지 한번 잘 살펴 보세요. 작은 관심도 힘이 되더이다.

서울에 가게 되기까지, 그리고 나름 암담했던 순간들은 서울 편에 정리해서 한번 써보도록 할게요.

서울에 다녀 오면서 제가 가장 굳게 결심한 것은 내 집을 찾아서 이사를 해야 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타이베이에 오면서 제 자신을 너무 얕잡아 봤어요. 저에게 저만의 공간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간과 했던거죠. 제가 힘들어 졌던 데는 다른 여러가지 요인들이 있었지만, 그 중심에는 '친구네 집에서 신세를 지고 있다.'가 가장 컸습니다.

설이 지나고 타이베이에 돌아 오자마자 집 구하는 인터넷 싸이트 하루 종일 보기를 열흘이 넘게 했습니다. 방콕 최중심부에서 50평방미터 짜리 거실+침실+발코니+수영장의 완벽한 구성의 '풀리 퍼니시드' 신축 건물에 살다 온 저는 '스포일드' 될만큼 스포일드 돼서 제 예산에 맞는 타이베이 집들은 인터넷 상의 사진만 봐도 우울증이 끓어 오르더군요. 한번 높아진 사람의 기준이 낮아질 수 있나요? 어휴. 언제 어디로 떠날지 모르는 삶을 살고 있으니 가구까지 다 갖춰진 집을 찾아야 하는데, 항상 저같은 외국인들이 셀 수 없이 드나드는 국제도시인 방콕과 달리 타이베이에는 그런 곳들이 많이 없어서 집 찾기의 난이도는 더 높아 졌습니다.

집 자체가 괜찮은 집이 있다 하더라도 이건 누가 봐도 악취미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가구들을 들여 집안을 복잡하게 해 놓은 집들 하며, 흡사 살인 사건 현장 같은 못난 집들의 대 카니발이 며칠이고 이어 졌습니다. 
취향 차이이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왜 비싼 돈 들여 좋은집 사놓고 가구들을 맨 천원마트 물건 같은 것만 들여 놓는 겁니까? 저는 타이베이에 오면서 큰집을 빌려 게스트 하우스를 해 볼 생각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큰집들도 좀 봤는데요, 마음에 드는 집이 나오면 '외국인인 너를 내가 어떻게 믿고 집을 빌려 주느냐? 일년치 세를 한꺼번에 달라.'는 정신이 꼬부라진 집주인이 전화를 받는 식이었습니다. 세상을 어떻게 그렇게 사세요?가 목구멍 까지 올라 왔지만 참았습니다.


제가 타이베이에 와서 가장 살고 싶었던 동네는 지금 다니고 있는 타이완사범대학 근처 였습니다. 동네가 참 조용하면서 있을 건 다 있고, 고즈넉한 품위 같은 것도 있다고 할까요? 그러나 역시 그런 것은 저에게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서 그 동네 집값은 상당히 비싸더라고요. 그런데 그 동네에 괜찮은 집이 하나 딱 나온 겁니다. 처음으로 집을 보러 갔어요. 집도 괜찮고 집주인도 괜찮고 월세도 제 예산에 딱 맞았는데 제가 괜히 월세 좀 깎아 보려고 뜸 들이다가 다른 사람이 먼저 계약을 해버리는 바람에 그 집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며칠 더 인터넷을 뒤지고 또 뒤졌습니다.

집주인이 업데이트를 하자마자 딱 찾아낸 아래의 집.
바로 전화를 걸어 다음날 집을 보러 가겠다고 했습니다.


집 앞에 절도 있고요.


그런데 한가지 좀 걸리는 게 있었어요.
동네가 좀...

이 동네는 타이베이의 왁자지껄한 유흥가인 종샨베이루 근처라 치안이 좀 걱정 되더라고요. 항상 조용한 주거지역에만 살았던 저에게는 집 주변의 복작대는 생태 자체가 약간 낯설기도 했습니다. 또 제가 주로 노는 동네인 동취나 신이에서 놀고 밤늦게 택시 타고 들어 오기에 약간 애매한 거리라는 것도 있었어요.

그런데


따라! 첫인상입니다.


7층짜리 건물의 8층 옥상에 있는 이집이 글쎄 절더러 '어여와' 하는 겁니다.
첫눈에 어떤 매력이 있더라고요.
집주인도 참 괜찮은 분이고요.

그래서 바로 계약 해버렸습니다.

바베큐 파티도 한번 했어요 벌써.


여기 이 옥상에는 야외 주방과 식탁이 있는데요, 집 앞에 사는 비둘기 가족이 제 식탁에다가 대놓고 똥을 싸고 가더라고요, 그것도 날마다. 이사 처음 와서 저 똥싸개들을 어떻게 쫓을까 고민 하다가 옥상에 흩어져 있던 저 화분들을 저렇게 옮겨다 병풍을 둘렀더니 참 쉽게 해결 됐습니다. 비둘기 한마리 다치지 않고 저는 똥에서 해방 됐어요. 한편 저 비싸 보이는 화분들을 제가 저렇게 써도 되겠냐고 집주인에게 여쭤 봤더니 '그럼' 한마디로 흔쾌히 허락을 해줬어요. 대인배죠?


옥상 물청소도 빡빡 했습니다.


비둘기들이 싸질러 놓은 똥이며 그동안 묵은 이끼까지, 군대때 대청소 하던 그 신공을 발휘해서 빗자루로 빡빡 닦아 냈습니다. 이사 와서 일주일 내내 집 안팎으로 청소만 했는데요, 그게 참 마음을 차분하게 해주더군요.

이케아 이케아 이케아


집 계약한 날 바로 이사를 시작 했고요, 그 다음날엔 타이베이 오고 세달만에 마침내 짐을 다 풀었습니다. 그러게요. 짐을 쌌으면 풀었어야 하는데, 그걸 미루고 있었으니 마음이 편할리가 없죠. 이런 간단한 것을 왜 덮어두고 못 봤을까요? 바보.

짐을 다 풀고 나서는 이불이며 컵이며 이것저것 마련 하느라 이케아를 하루에 한번씩 일주일 내내 다녀 왔습니다. 필요한 것들은 왜 꼭 한번에 안보이고 집에 오면 생각이 나는 걸까요? 다른 저가 생활용품 상점들도 몇군데 둘러 봤는데 역시 이케아가 가장 저렴한 가격에 시각적으로 가장 훌륭한 제품들을 팔고 있다는 것은 거스를 수가 없는 현실이더군요. 큰돈 들이지 않더라도 생활의 기본적인 품위를 갖출 수 있다는 것은 조금 오버해서 '인류애의 실현'이라고 느껴 졌습니다. 까르푸만 가더라도 이케아와 비슷한 가격에 교도소에서나 쓸법한 물건들이 넘쳐 나잖아요? 곧 한국에도 이케아가 개업을 한다고 하는데, 첫 매장은 광명역 부근이라면서요? 차가 없으면 접근하기 쉽지 않을 것 같은데, 타이베이에는 시내에 이케아 매장이 하나 있어서 꽤 편리합니다. 난징동루 역 근처니까 놀러 오신 분들은 한번 들러 보세요.


괜찮죠? 제 옆에서 막 자고 싶죠?


엘리펀트의 김원선 형이 손수 만들어준 '가내수공업' 전등은 머리맡에 착실히 뒀고요(생색 안내주면 삐질까봐요). 저 시트는 세일 하길래 집었습니다. 제가 청소년 때 파랑색을 좋아해서 방을 파란 전지 도화지로 도배를 해놓고 청소년기를 보내서 그런지 지금은 딱히 파랑색을 좋아 한다고 하기는 그런데도- 뭐 사러 갔다가 집에 와서 정신 차려보면 죄다 파랑색만 골라 온 제 자신과 만나곤 합니다. 저의 잠재의식이 파랑이 편한가봐요.
 
밤으로는 아직도 날씨가 쌀쌀하고 발이 무진장 시려워서 좀 지랄맞아 보이지만 슬리퍼도 신고 있어요 호호호. 저거는 앙코르 왓 갔을때 호텔에서 들고 온건데, 저런거 갖고 와서 적절하게 쓰면 참 기분 좋죠잉.


집주인의 돋는 센스


이집에서 마음에 드는 것 중에 하나는 세면대가 이렇게 화장실 밖으로 나와 있다는 건데요, 이게 참 작은 센스이지만 참 생활을 편리하게 만들어 줍니다. 옷 다 입고 양말 다 신고 마지막에 손 씻으러 화장실 들어 갔다가 화장실 바닥에 물 뭍은거 밟았다가 양말 갈아 신은 경험들 다들 있잖아요? 이렇게 하면 됐던 거였어요.

방콕에서 100킬로어치 싸온 짐 안에는 저런 것들이 있었습니다. 네스프레쏘 커피머신, 유강 아줌마가 사주신 전기밥솥, 토스터기. 이사오던 날은 험난 했지만 역시 들고 오길 잘했습니다. 저 세가지가 제 생활을 얼마나 윤택하게 만들어 주는지.

이사 해보니까 이사 하느라 집 구하러 다니고, 마침내 마음에 드는 집을 구한 사람이 주변에 있으면 꼭 축하를 해줘야 겠더라고요. 그동안은 집 구하기가 이렇게 힘든 거라는 걸 정말 모르고 살았어요. 평생 한집에서, 이사 다니는 스트레스 없이 저와 제 동생을 키워주신 위대한 엄마 아빠께 느닷없는 고마움을 전합니다.

이사한지 삼주차, 타이베이의 날씨는 오늘도 꾸룩꾸룩 하지만 저는 날마다 꼭 그런건 아니더라도 대체로 이럭저럭 괜찮아 지고 있습니다. 새로운 친구들도 많이 만들었고요. 제 삶이 이런 식으로 제 정강이를 구두발로 걷어차 저에게 말해 주려는 것이 무엇인지, 도망가지 않고 고개 빳빳히 쳐들고 잘 들어 볼게요.

딥딥딥 더 밑에 까지 떨어져야 하이 칠 때 더 신나는건 뭐, 불변하는 파티의 매력이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