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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c

엄마, 밥 줘!

안녕하세요 박모과입니다.


제가 서울에 돌아온 지도 벌써 반년이 다 되어 갑니다. 아마도 제 인생에서 가장 빠르게 흘러간 6개월이 아니었나 합니다. 이 블로그를 통해서만 저를 아시는 분들을 위해 그간의 이야기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저는 보신 것처럼 방콕에서 타이베이로 이사를 했고, 계획한 대로 타이완국립사범대학 어학당에 등록해 만다린을 공부했습니다.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고, 술을 많이 마셨고, 파티에 다녔고, 맛있는 것을 찾아 다녔습니다. 그때까지 제가 늘 살던대로, 걱정이라고는 없이 즐거움만을 향해 살았습니다. 그 와중에 사랑에 빠졌었고, 아픔도 겪었습니다. (풉!) 이제와 생각해보니 풉! 하기는 했지만 그때는 꽤 심각했던 것이, 새로운 도시에서 그 아픔을 감당하기란 쉬운 것이 아니었던 겁니다. 그땐 정말 아팠어요. 게다가 비가 자주 오는 타이베이의 날씨는 그랬던 저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타이베이 친구들의 걱정과 격려에도 불구하고 저는 어떤 막다른 길의 끄트머리로만 끌려가는 것 같았습니다.


결국 6월에는 햇살을 찾아 캘리포니아(클릭)로 날아 갔습니다.


두달에 한번씩 해야 했던 비자 갱신을 위해 필리핀 가는 티켓을 알아보던 중에 친구 에스테반과 세훈형이 '밀러 뮤직투어 참가차 캘리포니아와 라스베가스에 다녀 오겠다.'는 페이스북 포스팅을 보고 충동적으로 미국행 티켓을 사버린 겁니다. 


사건의 내맠ㅋ (심지어 존대하는 사이였음)


여행은 그보다 더 좋을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저는 그들이 묵는 최고급 호텔들에서 카우치 서핑을 하면서 제가 개인적으로 갔더라면 입장이 무척 까다로웠을 파티들에 쓱쓱 다녔습니다. 파티라면 늘상 하던 것이고, 미 서부의 풍요로운 햇살은 '요놈 너 잘 걸렸다.'하는 세기로 눅눅해진 제 심신을 저 깊숙한 곳에서부터 바짝 말려 주었습니다.


세훈형과 에스테반이 일정을 마치고 서울로 간 후에 저는 다니누나와 메이누나의 배려로 누나들 집에 머물며 좀 더 시간을 가졌어요. 꿈을 꾸고 그 꿈을 실현 시키기 위해 이 세상 누구 보다도 열정적으로 사는 사람들을 만나고 좋은 대화를 했습니다. 저야말로 꿈 덩어리인 사람인데요, 캘리포니아라면 헐리웃이 있는 곳이고, 공간이 공간이니 만큼 저는 그곳에 있던 동안 더더욱 깊은 반성을 하게 됐습니다. 


왜 항상 미루기만 하는가?


어디까지 돌아서 갈 작정인가?


이 두가지 직구같은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고, 저는 거기에 대해서 더 이상은 댈 핑계가 없었습니다. 왜 나는 꿈만 꾸고 스스로 움직여 이루어 나가는 것에는 게으른 사람이 된 걸까요? 


One of the best days of my life at Venice beach, CA. Jamie Lee photography.


저 사진은 제가 그 여행의 끄트머리에서 여러가지 고민들을 털어내고 굳은 결심을 한 날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움직이자.'


놀아도 놀아도 끝이 없을 것 같던 제 3년 반 여행이 드디어 절더러 이쯤에서 다음 장으로 넘어 가라고 외쳤습니다.


누나들은 제가 캘리포니아를 정말 좋아하고 잘 지내니까 거기가 잘 맞으면 더 머물러 보고 살아 보라며 현실적인 방법들을 몇가지 알려 줬습니다. 저도 마음이 흔들렸지만 일단 타이베이 생활을 제대로 정리하고 싶다는 생각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1년으로 예정했던 만다린 코스도 마치고 싶었고요. 그래서 저는 타이베이로 돌아 갔습니다.


그러나 타이베이에 돌아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미국에서의 결심은 도로 흐지부지가 되고 있었습니다. 저는 적적한 기분을 달래려 날마다 뭔가 자극적인 것만을 찾아 다녔고, 찾아봐도 그닥 만족 못하는 날이 반복 됐습니다. 쾌락의 끝에는 넓고 높고 어두컴컴한 거대한 벽이 딱 버티고 서있는 것 같았어요. 깨어 있어도 가위에 눌린 것 같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샹하이에 사는 태국 친구들 쪼와 니나가 저를 보러 타이베이에 와서 저는 걔네를 데리고 제가 가장 좋아하는 클럽이었던 '프리모'에 갔다가 거기서 그만 소매치기를 당하고 맙니다. 제가 정말 뭘 잘 안 잃어 버리는 타입인데다가 어떤 물건을 하나 쓰기 시작하면 도저히 쓸 수 없을 때까지 쓰는 편입니다. 그때 잃은 지갑은 제가 스무살때 암스텔담에서 사서 어딜 가나 날마다 갖고 다니던 것, 군대에도 갖고 갔었고요. 이외에 남들이 생각할 때 꽤 위험한 세계의 여러군데에 갈때도 항상 들고 다녔던 것을 제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다고 믿는 도시의 가장 좋아하는 클럽에서 소매치기 당했다는 사실에 저는 굉장히 실망했습니다. 게다가 그 안에는 제 돈줄 역할을 했던 신용카드, 현금카드, 보안카드가 다 들어 있었으니 저는 이제 완벽한 무능력자가 되었지요.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딱 한가지 해결책은 부끄럽게도 부모님 도움을 청하러 한국에 다녀오는 것 뿐이었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무엇이든 해보겠다고 다짐을 한지가 얼마나 됐다고, 저는 다시 갓난아기가 됐습니다. 


며칠동안은 분해서 집에만 있었습니다. 집에 모아뒀던 동전들로 끼니만 때우고 그냥 집에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학교에 갔는데 지갑 사건을 친구 몇몇이 알고 있어서 선생님도 아셨습니다. 괜찮냐고 물어 보는데, 제가 참 감정조절 잘하는 편인데도 자꾸 그 상황이 답답해서 한숨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 그날 수업엔 하필 '도둑', '지갑', '잃어 버리다'같은 단어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예문 몇가지를 읽다가 제 차례가 되었는데 아아 감정이 끓어 올라 눈물이 뿜어져 나왔습니다. 8명이 둘러 앉아 수업을 받는 교실에서 저는 책상에 엎드려 엉엉 울었습니다. 너무나 억울해서요.

다음날 제 대만친구가 다녀와서 갚으라며 비행기 티켓을 사줘서 저는 서울에 올 수 있었습니다. (제가 그러고 있던 며칠 동안 리를 비롯한 제 대만 친구들은 제 옥탑방 문틈에 현금도 놓고 가고 저녁마다 있지도 않은 저녁 모임을 만들어 밥 먹고 가라고 저를 불러 내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뜨거운 우정에 고마움과 존경을 보냅니다.)


이 사건이 아니었다면 이때 저로서는 서울에는 정말 올 계획이 없었습니다. 온다면 제 외국생활에서 뭔가 멋드러진 것을 수확하여 뿅하고 나타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엄마 도움을 청하러 오다니요. 아이고 창피해라. 저는 원래 갖다 쓸 수 있을 때는 충분히 갖다 쓰자는 쪽이었기 때문에 어려울 때 엄마 도움을 받는 것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지만요, 이미 저는 독립적인 경제주체로 다시 서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해버렸기 때문에 부끄럽고 창피했습니다.


This is how my mom does.


그러거나 말거나 이 못난 아들내미에게 엄마는 이런 밥상을 차려 줍니다. '아이고 집에 먹을 것도 없는데 어떡하냐?'면서요.


그냥 막 저 버섯전을 씹는데, 저 게장을 쪽쪽 빠는데, 저 가지찜을 옴쏙 삼키는데 어디가 다 낫는 것 같아서 눈물이 나왔습니다(또 울어 ㅋㅋ). 그러고 보면 외국생활을 삼년 넘게 하면서 제게 가장 큰 결핍이었던게 바로 우리 엄마표 밥상이었습니다. 


한번은 봄에 서울에 왔는데, 마침 엄마도 외국으로 여행을 떠났던 적이 있었습니다. 낭패도 그런 낭패가 없었어요. 저는 두릅이며 취나물이며 엄마가 봄이면 당연히 차려주는 봄반찬들을 실컷 먹겠구나 하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는데 말입니다. 급한대로 서울 곳곳의 식당들을 찾아 다녀 봤지만 거기서 파는건 사시사철 똑같은 '식당음식'이지 봄이라고 봄나물을 파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매번 화장실 갔다 그냥 나온 것 같았습니다.

결국 엄마가 서울에 없으면 내가 서울에 오더라도 못먹는 음식이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그 방문에 커다란 아쉬움을 남겼지요.


엄마 밥상을 앞에 놓고 보다가 저 밥상 차려주고 옆에서 TV 보고 있던 엄마의 옆모습을 흘끗 봤습니다. '아니 우리 엄마 언제 흰머리가 저렇게 많아 졌냐? 엄마 왜 저렇게 늙었어? 그러고 보니 우리 엄마도 이제 환갑인데, 더 나이 먹으면 이 맛있는 것들 차려 주지도 못할텐데, 난 이 음식들 더 오래오래 맨날맨날 먹고 싶은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갑자기 전기가 파박 터졌습니다.


'서울에 돌아와 엄마 레시피를 정리하자!'

외국에 살면서 꾸준히 생각만 하고 뒤로 미루기만 했던 이 계획을 실행할 때가 바로 지금이라는 느낌이 왔습니다.


우리 엄마 허정희 여사는 순천의 풍요로운 가정에서 자라 어릴적 부터 맛있는 음식을 많이 접했답니다. 엄마네 할머니가 손맛이 특출나셨고, 엄마의 아빠 역시 요리하는 것을 좋아 하셨답니다. 그래서인지 엄마도 요리를 즐기게 됐고, 거기에 자부심 + 묘한 승부욕까지 갖고 있습니다. 스무살 무렵 독립!하여 서울에 살기 시작하면서는 새로 접해본 음식이 있으면 조리법 책을 뒤지지 않고 직접 연구해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어떻게든 그 음식을 해석 해왔습니다. 그런식으로 엄마가 수십년에 걸쳐 쌓아 놓은 보물같은 능력을 제가 잘 정리하면 이것은 '말이 되는 뭔가'가 될 거라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