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난주에 UMF 다녀온 여운이 아직까지 남아있다.
금요일에 '포터 로빈슨' 라이브를 본 것은 올해의 잘한 일.
최근에 '안주나 비츠' <월드 와이드> 새앨범을 사서 듣게 됐는데, 오랜만에 '안주나 레코즈' 특유의 선명하고 말초적인 유포릭 사운드를 들으니까 일단 귀가 즐거웠고, 최근 내 생활의 리듬과 싱크가 맞으면서 동기부여 효과까지 생겼다. '어보브 & 비욘드'의 비비씨 라디오 원 <에쎈셜 믹스>를 처음 들었던 2005년 여름 그 때부터 고속도로를 달리거나 몸 안 쪽에서 에너지를 끌어내야 할 때면 어김없이 찾아 듣던 그 사운드들과 내 몸의 싱크체계가 지금까지 잘 살아있었던 것이다.
내친김에 안주나 레코즈 계열에서 요즘 새롭게 등장한 친구들을 검색하다가 (요즘 트위터로 열폭중인) '맷 조'라는 아티스트를 알게 됐고, 자연스레 포터 로빈슨까지 연결 됐다. 마침 그가 서울 울트라에서 라이브 셋을 준비중이라는 소식을 겟. 그래서 몇 주 전부터 그 둘의 앨범을 한장씩 사서 듣기 시작 했다. 둘 다 명반이라 할만 했는데 특히 포터 로빈슨의 <Worlds>는 정말 굉장했다. '닌텐도 심포니', 그건 뼈대부터 탄탄한 총천연 색상의 세계였다. 갤러그나 팩맨같은 8비트 게임에서 따왔을 법한 사운드들로 꾸민 세부음, 과감한 디스토션, 극한으로 끌어올린 선명하게 날이 파탁대는 트립합 비트들이 내 눈 앞에 성을 쌓기도 하고 무지갯빛 점액을 힘껏 뿜어 대기도 했다. 닌텐도 아케이드 게임 안에 들어간 것 같다가도 장엄한 화성을 짚어내는 부분에서는 22살이라는 그의 나이를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1년 늦게라도 이런 앨범을 찾아낸 것이 행복했다. 그덕에 매일매일 출근길이 이 청년이 빵빵 뿜고 터뜨려 주는 축복으로 가득했고.
내가 어떤 아티스트의 공연을 이렇게 열렬히 기대해 본 게 도대체 언제였나?
내 젊음을 쇼 비즈니스에 바친 덕분에 영광스럽게도 좋은 공연들에 자주 초대받고, 노력하지 않고도 일상에서 좋은 것들을 누리며 살다보니 어떤 공연을 가던지 마음을 비우고 일단 가서 느껴지는 것들을 느끼고 즐기자는 쪽이 됐는데, 격하게 기대하지 않아 무엇을 보던지 전반적인 만족도는 높지만 나는 그만큼 느슨한 관객이 된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뒤돌아보기 시작했더니 그날 공연장- 올림픽 주경기장이 내가 그 곳에서 경험한 좋았던 것들을 막 끄집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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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에 이수만 씨가 사회를 보고 당대의 유로댄스 팀들을 여러팀 초청해서 무료로 진행했던 무슨무슨 댄스 페스티벌이 있었는데, 전 좌석 무료입장이라는 것을 신문 광고로 보고 찾아 갔던 것이 내 인생 첫번째 제대로 된 댄스파티였다. 내가 서울 올림픽 주경기장에 처음 가본 것이기도 했다. 그때 내 자리 주변에 멋진 20대 초반 형누나들이 꽤 많이 서있었는데, 그때는 그런 젊은이들도 춤추는 것을 어색해 했었다. 그러니 장내에 행사 진행 요원이 거의 없었어도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주경기장에서는 이후에 <드림 콘서트>라던지, <내일을 위하여> 라던지 대형 공연들을 더 자주 볼 수 있었는데, 그런 공연들이 생겨나면서 오히려 자리에 앉아서 응원도구를 흔들며 춤은 추지 않는 갑갑한 팬덤형 문화가 거기에 자리 잡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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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에는 마이클 잭슨이 처음으로 서울에 왔었고, 그 역시 주경기장에서였다. 그건 내가 남한 땅에 나고 자라서 본 최고의 무대였음은 물론이고, 인간이 만든 어떤 창작물이 '완벽하다'고 느낀 내 첫 경험이었다. 나는 그라운드 무대 앞 한중간에 앉아 있었는데 공연을 시작하기 한두시간 전부터 마이클 잭슨이 어렸을 때 불렀던 '벤', '아일 비 데어', 'P.Y.T' 등의 노래를 틀어주고, 그것을 오랫동안 마이클을 사랑해왔던 것이 한눈에 보이는 미국 관객들이 따라 부르며 자기들끼리 끌어안던 장면은 내가 살면서 본 가장 아름다운 순간들 중 하나이다. 지금도 그때 벤 나오던 때를 떠올리면 눈물이. 이후 이어진 공연에서 T자형 크레인 무대의 ㅣ 부분이 들려 관객석을 한바퀴 돌때 그위에 매달려 초인류적인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던 마이클 잭슨이 내 머리 위로 지나갔다. 전율. 아 멋있어. 마이클 잭슨은 살아 있는 생기였고, 스테디움 안 모든 것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총감독이자 재주꾼이었다. 나에게 뿐만 아니라 돌아가신 앙드레김 선생님을 비롯한 당대의 쟁쟁한 남한 수퍼스타들에게도 서울에서 마이클 잭슨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내 자리 주변에도 스타들이 많았는데, 내 자리 바로 옆옆에 클론 형들과 이본 씨가 일어나 계속 춤을 춰서 나도 덩달아 춤을 추고 놀았다.
첫 공연을 보고 광적으로 감동한 나는 다음날 학교에 가서 친구들에게 온종일 열광의 간증을 해댔고, 급기야 병이 도져서 끙끙 앓다가 다음날 있었던 두번째 공연에 전날 티켓에다 숫자 견출지로 날짜만 바꿔 붙여 들고 가보는 모험을 하기에 이른다. 첫날 보니까 당시로는 이나라가 그만한 대형 공연을 치러본 경험이 없어서 그랬던 건지 R석인데도 입장 시스템이 굉장히 어설퍼서 샤샤샥만 잘 하면 들어갈 수도 있겠다 생각한 거였다.
결과는? 흐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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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다, 19년 전에 서울이.
이번에 코첼라 가서 인상 깊었던게 시리얼 넘버를 심은 입장 팔찌를 선배송 해주고, 참가자들이 인터넷으로 미리 입장 등록을 하게 해서 입장하는데 드는 시간낭비를 없앴다는 것인데, 이번 울트라 서울은 아예 구매자 혹은 초대자가 팔찌를 입장 담당 스텝이 들고 있는 탭 PC에 대면 사전에 등록한 신분증 상의 개인정보가 뜨도록 코첼라 보다 더 진보한 시스템을 구축했더라. 울트라에는 이번이 세번째 간건데 해마다 진행이 더 매끄러워졌다. 중간 청소와 화장실 더럽고 부족한게 아쉽긴 했지만 이정도면 전세계 어느 페스티벌이랑 비교해도 최고 수준이라 할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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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터 로빈슨은 라이브 스테이지에 올랐다. 그 또래 K팝 가수들 같은 옷차림에 얼굴도 앳돼서 그가 무대에 올라 스크린에 얼굴이 잡히자 나와 내 친구들에게서 동시에 '와, 저렇게 애야?!'가 터져 나왔다. 공연 전에 여러 매체들에서 라이브 셋 소식이 알려져서인지 주요 헤드라이너 중 한명이었던 '하드웰'과 시간이 겹쳤음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도 훨씬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공연이 시작하자마자 들썩들썩 거렸다. 얼굴에 죄책감이 없어 보이는 생기 어린 20대 친구들 사이에 있는 것 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희망찬 미래와 함께 서 있는 것 같았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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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10월, 내가 홍대 앞에 월화수목금토일 놀러 나갔던 그때 어느 아침, 날 당시에 서울에서 가장 잘 놀고있던 그룹에 받아준 바람 형네서 아침에 누워서 이야기 하다가 '형, 클럽 말고 야외에서 파티 하는 것도 재밌지 않을까요?' '완전 예술이지.' '형, 그럼 우리 학교 축제 한다는데 총학생회에 말해서 파티 한번 해볼까요?' '야, 너가 하면 형이 팀 짜서 음악은 그냥 틀어줄게. 해봐.'
그말만 믿고 나는 다음날 내가 다니고 있던 중앙대학교 총학생회를 찾아가서 총학생회장을 만나 내 계획을 이야기 했고 총학생회장은 새내기가 학교 축제에 새로운 아이템을 들고 온건 사상 처음이라며 흔쾌히 도와 주겠다고 했다. 그는 신이 나서 도서관 뒷마당인 '해방 광장'을 써도 좋다고 했다.
해방 광장, 우리나라 첫 야외 '레이브', DJ 바람. 난 이미 세상을 다 가진 것 처럼 신이 났다.
일이 여기까지 풀리니까 준비할 것들이 산더미 같이 생겼는데, 나 혼자 해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에 거의 유일한 일렉트로니카 게시판이었던 <테크노 게이트> 게시판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을 올렸다.
-1999년 10월 27일 우리나라 최초의 야외 레이브 파티가 될 <cEntErEd>를 함께 만드실 분들 모이세요.
-우리는 rAvEr's union; 'ru'라는 유령 단체를 만들고, 파티가 끝나면 깨끗하게 해산합니다.
-ru는 어떠한 이윤추구 행위도 하지 않으며, 이 행사는 모든 것이 무료, 협찬받은 것들은 모두 참가자들과 나눠 먹고 마십니다.
그때는 다음 까페도 등장하기 전이라 테크노 게이트 게시판이 클럽에 다니고 전자음악 씬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거의 유일한 소통의 장이었다. 오늘날 페이스북, 트위터가 기능하는 토론, 설전이라던지 조리돌림, 행사 광고와 친목도모가 전부 거기서 이루어졌다. 그렇지만 넷상에서 닉네임으로만 존재하던 사람들이 과연 오프라인에서 만나 뭔가를 같이 해보자는 내 제안에 얼마나 반응할 것인지 가늠하기가 어려워 사람을 모으지 못할까봐 두렵기도 했다.
그런데 의외로 뜨거운 반응이 바로 터졌다. 그리고 이틀 뒤 첫 미팅. 리미, 구루, 모과, 선진, 샤먼, 아조 같은 아이디로 자신을 소개하는 사람들이 서로 만났다. 우리는 보도자료를 만들고, 바카디에 협찬 요청을 하고, 엠티비에 취재 요청을 보내는 등의 업무를 분담했다. '이렇게 나가다가 우리 내후년 쯤에 주경기장에서도 파티하면 좋겠다.' 누군가 말했다. 첫 만남 뒤 나는 테크노 게이트 게시판에 프랙탈 아트 작품을 올리던 영신에게 청해 받은 프랙탈 아트 작품 두개를 믹스해 -작업은 97년 배낭여행 때 뮌헨에서 만난 그래픽 디자이너 박현화 누나 사무실에서 도와 주셨다- 포스터와 플라이어를 만들었고, 우리는 그걸 나눠 온 서울에 붙이고 뿌렸다. 플라이어를 나눠 주는 일은 쉽지 않았지만 종종 플라이어를 보고 테크노 게이트에서 봤다며 격려해주는 실제 휴먼들을 만나면 힘이 났다.
행사 당일, 빌려놓은 스피커가 작동을 하지 않는등 우여곡절이 있어 땀을 뻘뻘 흘리며 막판까지 뛰어 다녀야 했지만, 전 층 형광등을 블랙 라이트로 갈아 끼워버린 문과대 건물과 '조커 레드'에서 빌려온 무빙 라이트 불빛에 물든 도서관 건물을 보고 있자니 쾌락의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마침내 DJ바람이 건 'Everybody Loves Sunshine'이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지는 순간, 모든 긴장감이 샤하고 사라지면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정말, 정말로 행복했다. 1초 1초가 꿈 속이었다.
파티에는 천명 정도가 모였다. 그때 활동 중이던 프로덕션 관계자들, 클럽 사장님들, DJ 형누나들과 파티마다 보던 멋잿이들과 꾸러기들도 정말 많이 와주었다. 설레였다! 그리고 우리가 그 파티를 기획 하면서 기대했던 동네 주민들도 찾아와 구경을 했다.
클럽에 다니던 사람들은 뻥 뚫린 야외에서 원래 잘 놀던대로 금방 적응해 놀기 시작했지만, 수가 더 많았던 나의 학우들, 20대 초중반의 젊은이들은 어느 장단에 맞춰 어떤 춤을 춰야할지 몰라 상당수가 우물쭈물 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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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터 로빈슨의 공연을 지켜 보다가 나는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뇌압, 안압이 상승하는 것을 경험했다. 소리와 절묘하게 싱크가 맞아 떨어지는 고화질 이미지들은 '아, 인간이 다른 인간한테 이렇게 해도 되나?'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건 분명히 인간이 처리할 수 있는 것보다 용량이 월등하게 큰 시각 폭탄이었다. 거기에 완벽에 가깝게 제어한 라이팅과 폭발한 꽃가루, 그 꽃가루 위에 라이팅 + 폭죽이 터지는 와중에 한동안 내가 뭘 보고 있는지를 따지지 않게 되는 트랜스 상태로 접어 들었다. 실제로 지금 나는 그날 공연의 상당 부분을 정확하게 기억하지를 못한다.
몇년만에 드디어 페스티벌 무대에서 새로운 세대가 만든 새로운 어떤 것을 보고야 말았다는 벅참은 분명히 가슴 깊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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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터드의 하이라이트로 우리가 가장 큰 돈을 들여 야심차게 준비한 것은 도서관 옥상에서 폭죽을 터뜨리는 거였다. 그것만큼 야외에서 사람들 흥을 돋구고 막장으로 끌고갈 수 있는게 또 뭐가 있을까? 서울 불꽃 축제 만큼은 아니었어도 불꽃놀이는 충분히 멋졌고, 마지막 연발이 터질때 나와 내 친구는 옥상에 누워 그 예쁜 걸 보며 끝도 없이 웃었다.
옥상에서 내려오니 곧 경찰차가 왔다.
불꽃놀이는 반드시 사전에 신고를 해야 하는데 이것 때문에 주민신고가 들어 왔다, 음악 틀고 춤추는 것도 불법이다, 당장 음악을 끄고 해산 해라. 일방적 통보. 대학교 안이었고, 총학생회에서 지원하는 행사라 이런 것 따위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 줄 알았지만 막상 경찰이 오니까 총학생회에서도 별 도리가 없다고 했다.
일렉트로니카도, 이 사람들도, 이 놀이문화도 너무 쉽게 '시기상조'라고 했다. 내가 온 내 자신을 다해 사랑하는 그것들을 싸잡아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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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1999년 서울이었다.
울트라에 가면 내 안에서 아코디언 하나가 좌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