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일상에서 이만큼을 떠나와 생긴 마음과 시간의 공간에 새로운 장소에서 엉뚱하고 새로운 사건사고를 통해 새로운 기운과 자극을 채워넣는 게 내 여행.
16살 때부터 매해 한두번, 많을 때는 너댓번도 여행을 떠나곤 했다.
뭐가 그렇게 궁금하고 알고싶은 데가 많았던 건지 아무리 다녀서 채워봐도 채워지지 않을만큼 아주 목이 많이 마른 애였다 나는.
‘삶의 목적과 의미를 찾아 다니는’ 여행을 하다보면 영 재미가 없고 무엇보다 멋있어 보이지가 않았으니까 난 최대한 목적도 계획도 없는 열린 일정의 여행을 추구했다. 지금 생각 해보면 겁도 없지 1997년 1월에 한달 동안 유럽으로 혼자 떠난 여행에서도 매일 아침 그날 일정을 정하곤 했다. 목표는 당시 한참 유행하던 '돈 최대한 아껴쓰기'. 그래서 어지간한 도시들은 아침에 내려 하루 재밌게 놀고 밤 기차를 타고 밤을 보낼 수 있는 거리 만큼을 이동했다. 빨리 싫증 내는 16살 남자애한테 어떤 유럽 도시들의 겨울은 심각하게 우울했기도 했고.
여행 중후반 스위스 로잔에서는 여섯시에 길거리가 텅텅 비는 풍경을 보고 망연자실, 급기야 외로움에 혼잣말을 하기 시작했다.
‘이대로는 안되겠다. 따뜻한 남쪽 나라로 가자.’
그래서 간 곳이 로마였다.
테르미니 역에 내리니 아침이었는데도 뭐야 이거 따뜻했다.
입고 있던 점퍼를 벗어 배낭 옆에 꽂았다. 고등학생 때 나는 겨울에도 내내 반팔만 입고 지낼 만큼 피가 뜨거운 땀보였는데, 방을 찾아 테르미니 역 앞 숙소들 몇 군데를 다니니 실제로 땀이 났다.
두세군데 실패 하고 오만리라 정도 더 비싼 숙소에 갔다.
도미토리가 아니고 그나마 호텔이다보니 분위기가 뭔가 고급지고 음- 나만큼 대책없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2층에 있는 작은 로비가 그만큼 작은 까페와 붙어있어 옹기종기 아침을 먹고 있는 여행자들이 있었는데 아 빵냄새 (꼬르륵) 내가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으려니까 그 중에 한 붙임성 좋은 일본 대학생이 말을 걸어왔다. 지금도 기억날 만큼 밝은 미소를 띠고.
서로의 여행에 대해 이야기 하다가 내가 고등학생이라고 하자 눈을 크게 뜨고 ‘리어리?’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버렸다. 그 여행 내내 내 나이를 말하면 대체로 그런 반응이긴 했으니 난 ‘이 구역 막내 동생은 나야.’ 표정으로 빙그레 웃었다.
아무튼 이 숙소는 꽤 괜찮다는 투숙객의 생생한 후기를 들었으니 내 차례에 체크인을 하려는데- 아 그 때는 아이폰이고 아고다고 호텔스 닷컴이고 없었고 호텔을 예약 하려면 여행사를 통하거나 전화, 또는 ‘편지’를 썼어야 했다. 다만 이런 역 근처 숙소들은 주로 아침에 걍 가서 이렇게 부딪혀 볼 수 있었다.- 남아있는 싱글 룸은 내 일주일 숙박 예산에 육박했다. 트윈 룸 꽤 싼 방이 하나 있었는데 난 같이 묵을 룸메이트가 없었지.
좀 당황했는데 뒤에는 두세명이 나처럼 체크인을 하러 기다리고 있었다. 내 차례에 방이 다 나가면 뒷사람들은 짐을 끌고 또 다른 호텔로 가야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뭔가 묘하게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그 때 내 바로 뒤에 국제풍의 매우 세련된 동양 남자가 한명 서있었다. 가르마를 타서 양쪽으로 빗어 넘긴 머리도 반듯, 단추 두개 푼 흰색 셔츠도 반듯, 심지어 트렁크 마저 반듯.
우와 멋있다. (속으로 생각함)
‘익스큐즈 미?’ (어, 나 미쳤나?)
‘나 지금 방을 구하고 있는데 내가 배낭여행 중이라 여기 남은 싱글 룸은 너무 부담스러워서 그런데 혹시 괜찮으면 나랑 트윈 룸 나눠 쓸래요?’
바로 물어봤다. 세상 뻔뻔, 지금 생각 해보면 진짜 애였으니까 할 수 있는 거였는데 또 이사람 반응:
‘SURE’
우와 나를 언제 봤다고? 우와 신기하다.
방 가격을 듣고 당황해 머뭇대는 표정을 지은 나를 한심하다는듯이 고새 턱을 괴고 쳐다보던 털보 로비 맨도 ‘이 녀석 봐라?’ 표정으로 웃었다.
그렇게 만나게된 다이스케 씨는 이탈리아에서 프라다 제품을 사다가 일본에 파는 병행수입 업자였다. 스물일곱 살.
지금 사고로 생각해 봐도 그 때 사고로 생각해 봐도 참 일어나기 힘든 만남이었는데, 그는 너무나 흔쾌히, 깔끔하게 나와의 룸 셰어링을 허락했다.
그 후로 세밤, 나는 낮에 나가서 포로 로마노랑 바티칸을 구경하고, 스페인 광장 계단에 한참 앉아 있다가, 어디선가 우연히 다른 도시에서 만났던 한국 형들을 만나 -신기하게 유레일 패스 들고 배낭여행 다니다 보면 역에서 만났던 사람들을 또 만나곤 했다. 뮌헨같이 ‘모이는 역’에 가보면 한국 사람들이 백명씩 대합실 노숙을 하고 그랬는데, 거기는 완전 만남의 광장이었다. 요즘도 그런가? 한번은 나보다 더 애기같이 구는 형이 ‘막내야!’ 역이 떠나가라 불러서 미친듯이 달려서 내 기차에 탄 적도 있음.- 폼페이에 다녀오고 밤에는 다이스케 씨랑 방에서 잠들기 전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아직 프라다는 몰랐지만 리바이스랑 마리떼 프랑소와 저버를 좋아하고 엠티비랑 채널비를 달고 사는 애였으니까 말하자면 이것저것 잡다하게 즐기고 사는 청소년이었으므로 이야기 거리는 많았다. 그래도 대체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았는지 우리는 매일 밤 몇 시간이고 막 새벽까지 얘기를 하고 그랬다.
영화 패션 스타일 음악 스포츠 연애 일본 한국- 이슈도 다양했다.
지금 생각 해보면 스물일곱 청년이 자기 사업차 현금을 몇천만원 들고 바잉 하러 이탈리아 까지 와서 하루 종일 일하고 들어와서 피곤하고 귀찮았을텐데 열여섯 에너자이저가 꺼내는 어찌보면 유치할 수도 있는 얘기들을 다 응대 해주고 자기 일, 패션에 대한 이야기도 술술 들려줄 수 있었다니 대단한 일이다. 나중에 일본에 ‘남에게 폐 끼치지 않기’ 문화가 있고 보통 그게 다른 어떤 가치 보다도 위에 온다는 것을 알고나니 더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한번은 내가 늦잠을 자서 낮에 일어난 적이 있는데 다이스케 씨는 이미 일하러 나간 상태였다. 샤워 하고 나와서 우연히 그의 침대 옆 의자에 놓인 손가방을 봤는데, 만엔짜리 지폐가 두툼하게 차 있었다. 심장이 두근두근 할 정도로 큰 돈. 그때 난 정말 놀라고 감동했다.
처음 만난 사람을 이렇게까지 믿어줄 수도 있구나.
나는 형이 없고 중고등학교 때도 저 사람처럼 살고싶다 우러러 볼만한 멋진 형이나 선배, 멘토? 같은 사람이 없었다. 그때 한국엔 우상 삼을만한 연예인이나 쏘셜 피겨도 없었고. 그런데 며칠동안 곁에서 다이스케 씨를 지켜보고 열린 대화를 나눈 것 만으로도 나는 이미 꽤 자라 있었다. 나보다 나이가 열살도 더 많은 어른 남자가 뭘 가르치거나 바로 잡으려 하지 않고 나를 인격체로 대우해 줬다는 것 자체가 나를 크게 했다.
로마에서 삼박사일을 보내고 어느덧 우리가 헤어질 시간. 헤어지는데 고새 정이 많이 들었고 뭔가 아쉬운데 나한텐 일정같은 것이 없었으니까
‘혹시…괜찮으면 저 밀라노 따라가도 돼요?’
또 ‘SURE’
그래서 나는 오전에 로마를 출발해 피렌체를 구경하고 저녁 때 밀라노에 갔는데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창밖 풍경은 점점 다시 겨울이 되고 있었다. 밀라노 도착해서 역 근처 숙소를 찾아가고 있으려니 이미 해가 다 져서 칠흑같이 컴컴한 밤이었다.
심지어 간간히 진한 오렌지 빛 가로등이 켜져있는 음산한 길에는 왜 아무도 없어 무섭게?
맥도날드 지도를 보면서 다이스케 씨가 준 주소를 찾아가고 있으려니 저 앞에서 어떤 날쌔게 생긴 20대 초반 젊은이가 -이탈리아 역 근처에 아직도 많은 스타일. 머리는 젤로 뻣뻣하게 세우고 딱붙는 살짝 물빠진 청바지를 엉덩이 4/5지점에 내려 입은, 시대가 시대니 만큼 인종 설명은 생략하기로 한다.- 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아 씨팔 깜짝이야!’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을 정도로 어디서 그가 샤샤샥 다가와 있었다.
‘지도에 너무 집중했나? 정신 차려야지.’
‘휙!’ 휘파람을 불어서 내가 돌아 봤더니 그는
‘너 가방에 드러운 거 뭍었는데?’ 했다.
그래서 가방을 살짝 돌려서 보니 아이씨 진짜로 가래침이 커다랗게 뭍어 있었다.
순간 ‘유럽 배낭여행 101’에서 읽은 도시괴담이 머릿속에 딱 떠올라서 나는 일단 냅다 뛰기 시작했다.
진짜 뒤도 안돌아보고 전속력으로 뛰었다.
그게 뭐냐면 주로 역 근처에서 나처럼 지도 보면서 걷는 애들에게 한명이 접근해 가방에 침이나 새똥처럼 보이는 오물을 투척- 여행자가 당황해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오물을 닦으려 긴장을 푼 상태를 이용해- 대기하고 있던 공범 날치기가 가방을 잽싸게 낚아채 도주한다는 그럴싸한 수법이었는데 하도 그럴싸해서 처음 읽었을 땐 누군가가 지어낸 무용담 같았다.
그런데 와, 내가 실제로 그 현장에 들어와있습니다?
밀라노 첸트랄레 역 근처 2성급 호텔 ‘아다’에 도착 했을 때 나는 혼비백산해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방금 전에 있었던 일 얘기를 하니 호텔 주인 부인이 실제로 자주 일어나는 일이라며 큰일 날 뻔 했다고 달래줬다.
이 와중에 나는 들고 다니던 지갑을 잃어버려 곤란해 했었다고 하는데 그 부분은 이제껏 까맣게 잊고 있었다. (하도 사건사고가 많으니 나쁜 일은 빨리 잊어 버리는 쪽으로 진화한듯.)
이번에 다이스케 씨가 얘기 해줘서 어렴풋이 생각이 났다.
다음날 다이스케 씨는 프라다에 바잉을 갈건데 구경하고 싶냐고 물어봤다.
‘SURE’
나는 엄마 지갑 하나 정도 사다주면 좋아하겠지 순진한 생각으로 따라 나섰다.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두오모 왼쪽 갈레리아 안 프라다 매장-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본 하이패션 매장이었다. 그때만 해도 일본 단체 관광객들이 정말 많았다. 그해 프라다는 꽤 모던한 제품들이 많아서 언뜻 보면 만만한 캐쥬얼 제품들 같았다. 그래서 뭔가 자신감이 확 생겼다. 이것저것 집어서 보다가 뭔가 엄마 목욕 다닐 때 들고 다니면 좋을만한 스포티한 손가방 하나가 마음에 들어서 가격을 봤다.
댕-
그 작은 가방 하나가 내 여행 경비 반보다 더 비쌌다. 슬그머니 내려놓고 핸드백 쪽을 보고 있던 다이스케 씨에게 쪼르르 가서 조용히
‘생각보다 엄청 비싸네요?’ 하니까 그가 웃으며
‘그렇지? 그런데 일본에서는 없어서 못 사. 내가 사가면 바로 다 팔려.’ 했다.
음. 나는 새로운 세계를 알게 되었다. 믿거나말거나 내가 이 여행을 떠나기 불과 5달 전에 한국에 보그 코리아 첫 호가 나왔고, 그때가 우리나라에 하이패션이라는 장르가 막 소개될 때였다. 갤러리아 백화점이 ‘명품관’이라는 것을 만들고, 케이블 ‘여성’ 채널들이 해외 컬렉션 비디오들을 틀어주기 시작한 것도 다 그무렵이다. 나는 이 여행 이후 학교 갔다 집에 오면 프렌즈를 보고 그 뒤에 이어지는 유럽 컬렉션 실황을 몇개씩 보곤했다. 매일매일.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