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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길에서 배운 영어라 어떤 단어/표현을 어디서 누구로부터 배웠는지 가물가물 한 것들이 많지만 이 단어 하나 만큼은 출처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

[쿨! cool!]
-1995년 여름 네덜란드 플레보랜드 세계 잼버리에서, 유타 보이 *새뮤얼 이븐슨에게서

잼버리는 전세계에서 모인 2만여 스카우트 애들이 11일 동안 거대한 캠핑장에서 한데 어우러져 캠핑을 하며 축소된 지구를 경험해 보는 스카우트의 올림픽 같은 행사인데, 그해에는 마침 지구상에서 가장 선진화된 합리성을 사회에 구축한 고등문명 국가인 네덜란드가 주최국이라 캠핑장에는 담배부터 메리제인까지 '안되는 게 어딨어?'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 '열네살까지 살아보니 도저히 여기는 답답해서 안되겠다, 고등학교는 프랑스로 가야겠다.'던 나에게는 그냥 그곳이 꿈이 현실이 된 현장이었다.

낮에는 한 국적당 2명/ 한조에 8명씩 소그룹을 만들어 이런저런 액티비티를 하게 했는데, 한국 베이스 캠프로 돌아오면 선배 형들, 대장님들 분위기에 병영캠프 느낌이 들었기 때문에 나는 아침에 한번 나가면 되도록 베이스에 돌아오지 않으려는 노력을 했다. 그러던 중 활동 초반에 기초연기 활동에서 만난 엉뚱한 미국애들 두명과 죽이 잘 맞아서 그 다음 액티비티도 같이 돌았다. 그 중 하나가 동갑내기 새뮤얼이었다.

잼버리 가기 전에 영어 공부만 2년 동안 해서 영어로 간단한 의사소통은 얼추 다 할 수 있었던 나였지만 그 얼추라는 표현 스펙트럼이 좋으면 good, 웃기면 funny, 나쁘면 bad, 이렇게 단순한 중등 교육 과정에 머물러 있었다. 하루이틀 같이 붙어 다니는 날이 늘어나고, 걸어서 20분이 넘게 걸리는 서로의 영지까지 찾아 다닐 정도로 친해 지니까 서로 표현할 것이 더 많아 졌던지 우리는 서로에게 영어와 한국말을 가르치기 시작 했는데, 해외 여행 중에 다른 언어권 친구를 한번이라도 사귀어 본 분들은 경험 하셨을 것 처럼 나도 그 미국애한테 '아싸, 씨발, 좋아요, 개새끼, 졸라' 같은 말초적인 표현들을 가르쳤다.

'Cool!' 내가 씨발을 가르쳐 줘도 쿨, 개새끼를 가르쳐 줘도 쿨, 맛있어를 가르쳐 줘도 새뮤얼은 쿨을 연발했다.
'쿨? 그게 뭔데?'
'Cool is cool.' 그러더니,
'…When you see something really good, you say cool.'
'…And you can also say that when someone is really cool, someone like you is cool, my good man.'
나도 모르게
'Cool' :-)
듣기로만 배운 단어니까 그 후로 한참동안 나는 쿨을 cool이라고 쓰는지도 모르고 'Koo' 정도로 쓰는 미국 애들 은어라고 혼자 이해해버리고 믿고 있었다. 그 후 새뮤얼과 붙어 다니던 일주일 내내 나는 장소와 상황과 상대를 바꿔 가면서 '쿨'을 적어도 삼백번 이상 외쳤던 것 같다.

그때가 돌이켜 보면 나로서는 굉장히 예민하고 감수성으로 똘똘 뭉쳐 있었을 땐데 한가지 표현을 그렇게 온종일, 일주일 넘게 순수하게 좋아서 외쳐댔던 것이 내 삶이 가고자 하는 방향을 일정 부분 바꿔 놓았다.

나 쿨하게 살았다.
론돈 이성 헐리웃 그루브와 유머 꼬팡간 파티 몬스터 빠리 깍쟁이를 한꺼번에 향해 가면서-
뭘 해보겠다는 결기나 독기 없이. 감정이 상하지 않게, 다치지 않게, 냄새나지 않게, 험한 꼴 되지 않게, 뒤돌아 보지 않게, 짜치지 않게, 엉겨붙지 않게, 미간 찌푸리지 않게, 언성 높아지지 않게, 말 질질 끌지 않게, 조르고 졸리지 않게 적당한 선에서 식히고, 더 끓지 못하게 발을 뒤로 빼고, 좋다고 하면 전화를 피했다. 간다면 붙잡지 않았고, 그러고 돌아와선 행여 내가 먼저 전화 할까봐 즐겨찾기에서 그 전화번호를 뺐다.

식어서 김 빠지고 쿨 해지면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만나서 더 생글생글, 더 얼토당토 않은 대사로 상황을 누그러뜨리고 애교를 부려서 어찌됐건 표정이야 떫떠름 하더라도 쿨 한 마음으로 집에 다시 돌아갈 수 있게 했다.

잡으려면 잡히지 않고 '젠틀'하게 기민한 인상을 남기고 샥샥 빠져 나와서 마지막엔 홀가분한 상태로- 내공간에 온전히 '혼자'로 돌아와 있는게 내 '쿨'이었다.

20대 초중반 섬이 좋아서 일년에 몇번씩 힘든 줄도 모르고 타이만을 배 타고 건너 다니면서 난 그냥 섬이 되고 싶었었나봉. 




*페이스북 생기고 난 다음에 여행하다 만난 친구들을 거의 다 찾아 냈는데 아무리 검색을 해봐도 이친구만 못찾고 있었다. 그래서 소식이 더 궁금했는데 이 글을 쓰다가 또 궁금해져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인스타그램에서 검색을 해보니 있다. 그는 뉴욝에서 아티스트로 살고 있다.
http://www.samuelevense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