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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완은 110볼트!

우리 어렸을 때 기억나요? 그때는 쏘니 녹음기며 코끼리 밥통이며 일본 가전 제품이 집집마다 한두개씩은 있었고, 얘네를 쓰려면 '도란스;변압기'라는 물건이 필요 했잖아요? 우리나라가 110V에서 220V으로 전환 되었던 것이 저 초등학교 고학년 때인가 그랬는데, 그때 구청에서 집집마다 도란스 나눠 줬던게 기억이 나는군요.

요즘은 대부분의 기계들이 아무데나 꽂아도 자기가 알아서 적정 볼트를 찾아 먹는 '프리볼트' 시대지만 그때만 해도 전압이 다른 기계를 구멍만 맞춰 꽂았다간 순식간에 집안이 회로 타는 냄새로 가득차곤 했다는 그런 거시기. 한번의 실수로 기계가 영영 못쓰게 되는 일도 많았던 아 옛날이여.

21세기와 함께 도란스라는 단어 자체도 우리 기억 저편으로 사라 졌지요.
그러나...

어뜨케...안되겠니?


타이완은 110볼트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었던 거시기!

세계여행자의 필수품 유니버설 아답터 사마


제가 가지고 온 대부분의 기계들이 요 유니버설 아답터만 끼워 주면 알아서 잘 작동하는 프리볼트 기계들이라 이것이 문제가 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는데요, 현대 남성의 생존에 꼭 필요한 생활 필수품 하나가 작동을 못하는 거였습니다.

네빠들은 알거임


제가 방콕 떠나면서 정말 동생처럼 아끼던 살림살이들을 (살림이 얼마 없으니 정들데요) 다 떠나 보내고도 저 캡슐들만은 뾱뾱이로 둘둘 감아서 바리바리 싸왔거든요. 네스프레쏘가 정식 수입이 안되는 태국에 살면서 꽤 고생해서 모은 그런 거시기라서요. 아무튼 며칠전에 나가기는 귀찮고 카페인은 땡기던 차에 느긋한 마음으로 시동을 걸었더니 글쎄, 수압이 전립선 질환이라도 걸린 것처럼 찌지리리 한 게 아닙니까? 이사에 필요한 절차(이사를 가거나 오랫동안 네스프레쏘 머신을 쓰지 않을 때는 반드시 사용 설명서의 이사 전 유의 사항을 확인하고 그대로 따라 주세요)도 완벽하게 다 따랐고, 심지어 저 기계는 어디 다칠새라 제가 직접 뱅기에 들고 타기까지 했는데도 말입니다.

안그래 보여도 제가 참 기계를 잘 다루고 왠만한건 혼자서 다 해결을 보거든요? 그래서 하루종일 해볼 수 있는 방법들을 총 동원 했는데도 커피가 캡슐 앞면 은박지를 못 뚫더라고요. 그걸 보고 있으니까 묘한 측은지심이...

수치심에 휩싸여 써비스 센터(타이완도 아직 네스프레쏘가 소비자 용으로 정식 수입이 안되고 있어서 매장용 기계들을 전문으로 하는 업체가 수리 대행을 하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친절은 한데 우리나라처럼 기사가 직접 방문을 한다거나 그런 정도의 세심함은 없어요)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상담원이 하는 얘기는, '전압이 달라 발생하는 당연한 현상이니 승압기를 구해서 다시 시도해 보라'는 거였습니다. 참, 네스프레쏘 메이드 인 스위스인거 아시죠? 하, 그사람들 기계도 어쩜 이렇게 고지식 하게 만들었을꼬?

그래도 기계고장이 아니라는 것이 참 마음이 놓였고, 승압기야 어디서든 쉽게 찾을 수 있을테니 문제 해결이다! 하고 좋아 했는데...
여러분, 우리가 사는 21세기는 이제 도란스 구하기가 힘든 곳이 된 거였어요.

무려 일곱군데 이상의 있을만한 가게들은 다 가봤는데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다이소 비슷한 가게에서 찾아낸 이것.

무섭게 생겼죠?


꽂았다가는 바로 스파크를 보게 될 것 같은 야생의 디자인, 맨손으로 만졌다가는 저것과 한몸이 되어 마블 코믹스의 주인공이 될 것 같은 팔천팔백원 상당의 이것.

네, 장갑은 끼고 있었기에 사망은 면했지만 실로 오랜만에 집안 가득 퍼지는 회로와 코일 타는 냄새를 경험했습니다. 아, 노스텔지아.
팔천팔백원은 단 10초도 못 버티고 산화 했습니다. 예측 가능한 디자인이었던 것이 천만 다행이죠. 아니었다면 커피 한잔 뽑아 마시자고 신세지고 있는 친구네 집을 불바다로 만들뻔 했습니다. 승압기라 요놈만 망가지고 다행히 네스프레쏘 기계에는 이상이 없었어요.

나흘이 지난 아직도 승압기 못 찾았고요, 서비스 센터도 자기들이 보유하고 있는게 없답니다.

여러분 심심하시면 한국 검색 싸이트에 '변압기' 쳐보세요. 한국 인터넷에는 정말 없는 게 없구나 하실 겁니다. 변압기 쇼핑몰이라는 것도 있더군요. 그러나 아직도 일등 포털이 '야후(네, 야후가 아직도 있더라고요)'인 타이완 인터넷에선 신기할 정도로 없더라고요. 타이완도 나름 전자 강국인데 말이에요.

타이완을 비롯해서 110볼트를 사용하고 있는 나라로 이사를 가시는 분들은 자신에게 꼭 필요한 기계에 맞는 용량의 '도란스'를 꼭 한국에서 준비해 가실 것을 권해 드립니다. 일단 한국을 떠나면 구하기도 힘들 뿐더러, 훨씬 더 많은 돈을 쓰셔야 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