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아빠가 이 편지를 읽을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아빠. 사흘동안 고민고민 하다가 편지를 써.
아까 내가 '아빠 얼마동안 누워 있었던 것 같아?' 했더니 아빠가 손가락 다섯개를 쫙 펴서 '5일' 했는데, 아냐 사실은 1년이 됐어.
아빠가 병원에서 무서워 하던 기사 실장 아저씨 있잖아? 그분이 한 6개월 일 쉬다가 오랜만에 병원에 나왔더라고. 아빠한테 거칠게 대해서 나도 첫인상이 별로였어. 그런데 그 아저씨가 오늘 날더러 아빠 너무 야위웠다고 안타까워 하더라. 그 얘기 들으니까 나 너무너무 억울했어.
아빠가 아무리 의지가 없어도 내가 어떻게든 아빠 일으켜 세우겠다고, 나는 절대 아빠처럼 포기 안하겠다고 아빠한테 큰소리 쳤었던 내가 부끄러웠어.
오늘은 간호사 쌤이 아빠 위급해지면 실행할 응급조치들에 대해서 할건지 안할건지 묻는 동의서를 갖고 와서 체크해 달라더라.
역시 병원 가면 멘탈이 탈탈 털려.
아빠는 아무것도 하기 싫을 거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도저히 다 안한다고 할 수는 없겠더라.
아빠 맨날 그랬잖아. 사람 사는건 다 팔자라고.
아빠 팔자는 그런건가봐. 한달 굶어도 스스로 죽을 수는 없는 팔자.
말년에 외롭게 은천요양병원 침대에 모르는 사람들이랑 누워있을 팔자.
친구도 가족도 찾아오지 않는 먼 외딴섬 같은 판자.
아들한테 약해지고 죽어가는 과정을 느린 속도로 천천히 보여주는 팔자.
아, 그런데 아빠 말년 팔자가 다 나쁘지만은 않아. 작년말이랑 올초에 내가 아빠 병원비 때문에 엄청 힘들어 했었거든. 그때 내 친구들이 아빠 병원비 하라고 돈을 1200만원이나 모아 줬었어. 한국 태국 싱가폴 친구들이. 말도 안되지? 그걸로 상반기 잘 버텨 온거야.
이건 무슨 팔자라고 해야하나 그럼? 아들 복은 있는 팔자?
아까 오랜만에 아빠 왼쪽에 앉아서 오른쪽으로 돌아가 굳은 아빠 고개 돌리려고 낑낑 대다가 아빠 눈높이에서 아빠가 누워서 지금 보고 있는 병실 안 광경을 보고 말았어.
아빠 병원에 혼자 남겨두고 돌아와서, 지난 가을부터 지금까지 나 자다가 가끔 설 깨면 아빠 생각이 나.
아빠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아빠가 문득 정신이 들었을 때 놀라면 어쩌지?
그런데 오늘 보니까 아빠가 벌떡 일어나 어디 나가지도 못하는 채로 거기 누워서 보고 있는 장면이 너무 시시하고 재미 없어서 속 상했어.
아빠, 나 사실은 아빠가 지난 1년 동안 지나온 몇번의 위험했던 고비마다 나 아빠가 그만 편하게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친한 친구한테 얘기 하다가도 그랬어, '우리 아빠 이제 죽었으면 좋겠어. 편하게'
하느님한테 제발 우리아빠 좀 거둬 가달라고 기도도 했어.
미안해.
그그저께는 조선일보에서 하는 컨퍼런스에 갔다가 미국에서 온 과학자가 하는 강연을 들었어.
아빠도 들었으면 아주 좋아했을텐데.
어떤거냐면, 아빠같이 뇌병변으로 고생하는 사람들 머리에 전자 밴드를 씌우고, 뇌파 번역으로 소통이 가능한 메세지들을 찾아 내서 소통하는 기기와 소프트웨어를 개발중이래.
강연을 다 듣고, 그 분이 다른 과학자들이랑 이야기 나누는 걸 꽤 오래 서서 기다리다가 그냥 갈까 하다가, 뭔가 희망 같은게 느껴져서 다시 그분에게 가서 말을 걸었어. 아빠 상태 설명 했고.
그런데 가까운 장래에 완성을 시킬 가능성이 매우 높기는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실제 환자에게 대입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라더라.
그 사람은 눈이 아주 초록색이었는데, 진심으로, 정말 진심으로 나한테 미안해 하는 것 같았어. 그 초록색 눈동자가 너무 진지하게 나한테 미안하다고 해서 나 정말 오랜만에 울컥하고 말았어.
맨 뜬구름 잡는 얘기들
이런 시댄데, 우리는 왜 이러고 있을까?
어떤 사람은 2020년에 사람들을 화성에 보낸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서울에서 부산까지 25분만에 가는 튜브를 건설하겠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게놈을 통해서 인간 신체를 해킹할 수도 있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영원히 늙지않고 우리 가족의 역사를 알고 있는 '집사'로봇을 곧 상용화할 수 있을거래.
특히 맨 마지막 말을 한 사람네는 집안 가풍이 뭐든 기록하는 스타일이라 선대의 이야기들이 아주 사소한 것들까지 다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는 거야. 가만.
아빠도 나한테 일기장을 남겨 줬잖아.
왜?
아빠는 왜 그렇게 뭐든지 다 노트에 적었어요?
아빠나 나나 둘 다 처음 겪는 일이고, 한번 지나가면 돌이킬 수 없는 거니까 이 모든 것들을 다 기록했다가 저 미래에서 내가 보더라도 난 더 잘했으면 좋겠는데.
정말 나 뭐가 여기서 잘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아빠랑 막 싸우고 싶어. 속에 있는거 다 풀릴 때까지.
아빠도 목소리 크고 나도 목소리 크니까 온 동네가 떠나가라 싸우자, 쩌렁쩌렁 벽이 울리게.
하느님도 좀 듣고 조상님들도 좀 들으라고!
아빠, 그래도 살아 있으니까 아들 손도 잡을 수 있고 좋잖아.
나도 아빠 팔자 마칠 때까지 아빠 자주 보러 갈게.
힘 내.
2017년 7월 7일.
아빠가 내 아빠라서 항상 고마운 큰아들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