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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잘 가!

아빠는 나무가 됐다.


환자들 돌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알거다. 병원에서 오늘 당장 돌아가실 것 같다 호들갑 떨어서 가족들 다 불러 모아놓고 인사 하고 나면 환자가 다시 멀쩡해져서 한고비 넘기는 거. 우리 아빠도 7월에 한번 많이 안좋아져서 형제들 다 부르고, 장례식장 알아보라고 해서 그것도 알아보고, 수의도 사놓고 준비를 했었다. 그랬더니 아빠가 기력을 찾아서 8월 한달을 잘 넘겼다.

 

돌아가시기 전날에도 병원에서 곧 돌아가실 것 처럼 하도 그러길래 재양이랑 중용이랑 병원에 갔는데, 깡마른 데다 폐렴이 심해져 산소 호흡기를 차고 숨을 가쁘게 몰아 쉬고 있는 모습이 너무 안쓰러웠다. 그래서 아빠 이마에 맺힌 땀을 손으로 닦아주고 아빠 귀에다 대고 얘기 해줬다. ‘아빠, 고생 많이 했어요. 이제 그만 가셔도 돼요.’ 재양이는 날 보고 , 아무리 그래도 환자한테...’ 했다. 그러니까 아빠가 나를 쳐다 봤는데, 지쳐 보였지만 그 눈동자 만은 또랑또랑 빛이 났다. 나는 그걸 보고 아빠가 또 한고비 잘 넘기시려나보다 하고 애들이랑 술을 마시러 나갔다.

 

술자리에서 나는 평소 잘 마시지 않던 소주에 완전히 취해 인사불성이 됐고, 재양이한테 강퇴를 당했는데 싸우지 않고 순순히 집에 들어가서 잠을 잤다. 그래서 그랬는지 아침 여섯시 반에 칼 같이 눈을 떴고, 일곱시쯤에는 중용이한테 전화를 걸어서 잠깐 통화를 했다. 그런 기운이란 게 있는 건지 잠시 후에 중용이는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죠?’ 메시지를 보내왔다.

 

아침 내내 깨어 있다가 쉬는 날이었으니까, 뭔가 아무 것도 하지 말고 푹 쉬어야겠다, 오전 내내 아주 잘 쉬었다. 아침부터 병원에서 전화가 오면 전화 번호만 봐도 가슴이 철렁 내려 앉는데, 이날은 매번 다른 분들이 삼십분마다 전화를 걸어서 아빠 상태가 안 좋은데 이런저런 추가조치들을 실행해도 좋을지를 물어왔다. 간호사들끼리 서로 업무 소통이 안돼서 그런 거다. 이미 초반부터 연명치료 영역에 포함되는 것들은 거부 하겠다고 했는데도 자꾸 다른 사람들이 또 물어보고 나는 거듭 안 한다고 하니까 내가 아주 몹쓸 놈이 된 것 같았다. 얼른 병원에 가야 덜 불안할 것 같아서 씻고 병원에 갔다.

 

, 그런데 아빠가 정말 달라졌다. 발병 첫날부터 지금까지 아무리 안 좋은 순간에도 나만은 알아봤던 아빠가 하룻밤 사이에 눈에 초점을 잃고 나를 못 알아 봤다. 의식도 저만치 멀어져 있었다. 삼촌들에게 연락을 돌리고, 아빠 곁에서 아빠한테 해주고 싶었던 말들을 귀에다 대고 해주다가 어쩐지 밤이 굉장히 길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병원 앞에서 통닭 한마리를 먹고 왔다.

 

아빠 옆에 앉아 있는데 셋째 작은 아빠네가 오셨다. 작은 아빠가 보기에도 이제는 우리가 달리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보였던지 나한테 나가서 저녁을 먹고 오라고 하셨다. 오늘 밤 내내 병원에 있어야 할 것 같으니 뭘 좀 미리 든든하게 먹어 두라는 거였다. 먹은지 한시간 반 밖에 안됐는데, 그래도 더 먹어 둘까? 잠깐 고민 하다가, ‘아니에요, 저 먹은지 얼마 안됐어요.’ 하는데 삐이이이이- 기계음이 울렸다. 아빠 호흡이 급격히 떨어졌다. 지훈이가 성급히 간호사 선생님을 부르러 달려갔다. 나는 아빠 뺨을 손바닥으로 때렸다. ‘아빠, 정신 차려봐! 아빠!’ 아빠는 들숨을 크게 마시고는 목이 막혀 다음 숨을 쉬지 못했다. 얼른 고개를 옆으로 돌려 봤지만 기도가 열리지 않았다. 오후 내내 초점도 없이 뜨고 있던 눈이 스르르 감겼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아빠의 왼쪽 눈꺼풀이 프르르르 경련을 일으키더니 잠시 아빠가 움찔했다.

 

그건 마치 , 이제 다 끝났다.’ 하는 표정이었다.

 

죽음의 순간, 우리는 그냥 숨을 멈추는 걸까? 아니면 우리 안에 있던 영혼이 육신을 떠나는 걸까? 진실은 나도 겪어봐야 알겠지만 아빠의 마지막 순간은 정말로 아빠의 영이 떠나가는 모습이었다.

 

고통스러워 하지 않고, 형제와 아들이 곁을 지키는 가운데 비로소 평화롭게 맞이한 마지막 순간이었다.

 

아빠 쓰러지고 난 후에 아빠 혼자 살던 숙소에 찾아가 정리해온 물건을 아무것도 버리지 못하고 내방에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쌓아두고 있었다. 아빠는 부지런히 메모를 하고 일기를 썼던 분이라 당신 머리 속에 떠오른 것이 있고 눈 앞에 펜과 종이가 있으면 어디에건 기록을 했다.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 시시한 책이나 브로셔 신문지 쪼가리도 그래서 쉽게 버릴 수 없었다. 뇌경색으로 뇌의 반쪽 기능을 잃은 상황에서 아빠가 이렇게 까지 된 과정을 밝힐 수 있는 실마리는 그것들뿐이었으니까.

 

중간에 몇 번 내가 살고 있는 꼴이 너무 너저분해서 정리를 해볼까 마음을 먹고 손을 댔다가도 혹시 이 중에 아빠한테 중요한 게 있으면 어떡하나, 혹시라도 아빠가 일어나서 그거 어디다 놨냐고 하면 어쩌나, 도저히 엄두가 안나서 한숨 푹 쉬고 여기다 쌓았던 것들을 저쪽에 다시 쌓고 말았다.

 

푹푹 찌던 201674일부터 201794일까지, 거짓말 같이 딱 14달을 난 그렇게 살았다.

 

아빠가 종이와 책, 일기장에 적은 글들은 간병 하면서 중간중간 시간을 내서 읽어봤다. 그런데 내가 그 존재를 알면서도 아빠 생전에는 읽기를 거부했던 것들이 더 있었다. 아빠의 블로그와 이메일


아빠는 2002년께 인터넷을 배우고 어느 날부터 블로그를 시작했는데, 모든 것이 전체공개인 공간에 지극히 개인적인 고민과 누구에게나 고된 개인사를 매우 솔직하게 써왔다. 우리 집안의 크고 작은 일들, 바깥에서 일하면서 겪은 일들, 친구관계들에 대해 철저하게 자기 관점에서 썼다. 평소 어떤 일이 생기면 한쪽으로 치우친 본인의 확실한 의견을 표현하기 보다는 둥글게 허허 웃어 버리는 편이었던 아빠가 쓴 것들이라니 너무나 파격적인 글들이었다.

 

나는 벌써 12년 전에 우연히 그 블로그를 발견했고, 호기심에 십여편을 읽고는 도저히 읽을 수가 없어 읽기를 멈췄다. 그건 내가 알던 아빠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에, 한번도 상상해 보지 못했던 솔직한 한남자의 내면이 거기 있었기 때문에. 아빠의 사생활을 보호해 준답시고 '아빠, 이거 아빠만 볼 수 있는 일기장이 아니라 누구든지 볼 수 있는 거야.'라고 오지랖 떨어 말해 버리면 내가 그만큼을 벌써 읽어 봤다는 것을 고백하게 되어 아빠를 곤란하게 할까봐 고민하다 그것도 관뒀다.

 

다행히 방문자 수가 적은 것을 위안삼아 나는 안 본 걸로 하고 노력해서 잊고 살았다.

 

아빠는 이후에 이메일에 재미를 붙여 나나 재양이가 외국에 있을 때면 짧게 전화 통화로 할만한 내용들을 이메일로 써보내기 시작했다. 이메일 답장이 없으면 답장 해다오 국제전화가 왔다. 그랬던 아빠가 좀 귀엽고, 새로운 기술에 열려있는 우리 아빠가 자랑스러워 응원하는 차원에서 최대한 성실하게 답장을 하려고 했지만, 어떤 때는 솔직히 이메일 쓰는게 귀찮기도 했다.

 

아빠가 혼자 살기 시작한건 2013, 그때부터 아빠를 가끔 만나면 아빠가 '나중에 이메일 열어보면 거기 다 있어.' 했는데, 그게 무슨 소리인지 감 잡기가 힘들었고 도대체 저 분이 왜 저런 소리를 하나 했다.  3년 전 쯤인가 한번은 대화 중에 다짜고짜 본인 이메일 비밀번호를 가르쳐 주려고 해서 소스라치게 놀라 진심으로 정말 싫다고 거절한 적도 있다. 전에 아빠 블로그를 보고 충격 받고 며칠동안 감정이 복잡했던 것이 트라우마가 돼서 그랬던 것 같다. 솔직히 아무리 부모고 가족이라도 당신이 공개하고 있는 것 이상의 사생활과 속 마음은 알고싶지 않았다. 그 때 아빠는 내 반응이 예상치 못한 것이었던지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말로는 못하니까 내 마음 좀 읽어 달라는 거였는데.

 

장례 잘 치르고 2주일이 지나 아빠가 세상에 남긴 것들을 정리하는 과정 막바지에 그 블로그 생각이 퍼뜩 났다. (사실 아빠 발병 초기에도 생각은 해봤지만, 아빠가 괜찮아진다면 그것들을 읽었던게 실례인 것 같다며 그만 뒀었다.) 몇 날을 고민 하다가 그때 아빠 블로그에 찾아 들어갔던 경로를 기억해내 검색, 검색! 나왔다. 인터넷에서 뭐를 찾겠다고 하면 수사관 급으로 찾아내고 마는 내 검색 실력에 발동이 걸렸다고 하기도 쑥스러운 시점에 덜컥 나왔다. 그만큼 아무런 방어도 없이 전체공개로 아빠의 마음 속 이야기들이 네트 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의 방문자 수 1.

 

키보드 위에 얹은 손가락들 끝이 부들부들 떨렸고, 그채로 나는 아빠가 남긴 글들을 드디어 읽기 시작했다.

 

짧은 건 짧고 긴 건 꽤 길고, 좋았던 날, 싫었던 날, 내가 싫었던 날, 아내가 미웠던 날, 재양이가 답답했던 날, 스스로를 견디기 힘들었던 날, 형제들이 아쉬웠던 날, 고단했던 날, 아무 것도 할 게 없지만 집에 있기는 눈치가 보여 아침에 나가 무작정 버스를 타고 마지막 정거장 까지 갔던 날, 아내가 갑자기 맛있는 것을 차려준 날, 가슴 답답했던 날들이 어쩌면 그리도 솔직하게 적혀져 있었다.

 

문서 편집 프로그램에 옮겨 보니 A4 87페이지 분량.

 

그런데 포스팅 날짜를 따라가 보니까 블로그 마지막 글과 한참 활발히 쓰던 시기 사이에 몇 년간의 공백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아빠의 이메일들도 열어 보기로 했다.

 

아빠는 나와 재양이와 소통하는 용도의 계정 말고도 다른 포털에 이메일 계정 하나를 더 갖고 있었는데, 이것은 온전히 본인의 기록 저장소였다. 그러니까 내가 알고 있던 A계정으로 일기를 적어 B계정으로 전송해서 보관했다. 블로그에는 2003년 부터 4년여를 꽤 촘촘하게 기록해 두었고, 그 이후에는 이메일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바로 거기에 모든 것이 다 있었다-

 

우리 형제가 자라는 동안 거의 단 한번도 부모의 지위를 이용해 우리를 억압하거나, 우리가 꽤 잘못한 상황에서도 아들들에게 화 조차 몇 번 낸 적이 없을 정도로 자기 감정 컨트롤이 확실했고, 언제나 '애비 걱정 말고 니 앞가림이나 잘해'라며 '잘 감추는' 사람이었던 우리 아빠의 리얼 타임라인, 쿨하지만은 않았던 속 마음이. 그리고 건강하던 중년 남성의 몸과 마음이 서서히 연약해져 간 과정이.

 

아빠는 이미 2011년에 한번 갑자기 쓰러진 적이 있었다. 나는 태국에서 그 소식을 듣고 너무 놀라서 몇 시간 동안 진정을 못하고 울었다. ‘, 우리 아빠 같이 건강한 사람도 쓰러질 수가 있구나.’ 나는 당장 서울로 돌아 가겠다고 했지만, 아빠도 엄마도 좀 쉬니까 괜찮아 졌다고 걱정 안해도 된다고 안심을 시켜서 넘어 갔었다. 거기 까지는 나도 우리 가족도 모두 알고 있었던 팩트.

 

그런데 아빠 일기를 읽어 보니까 그 때 다니던 동네 내과에서 뇌경색이 의심되니 꼭 큰 병원에 가서 정밀 검진을 받아 보라고 권유했으나, 아빠는 본인에게 '진짜 큰 병이 있을까 무서워서' 병원에 가지 않았다고 한다. 수년 후에 본인에게 닥쳐올 이 모든 난리를 피할 수도 있었는데, 덩치가 커다랗지만 겁이 많았던 신사는 그 결정적인 기회를 날려 버렸다.

 

아빠가 이후 꾸준히 혈압약을 복용 하면서 나름 국지적인 관리를 해오긴 했지만, 혼자서 생활 하면서 아무래도 엄마가 있을 때보다 잘 챙겨먹지 못해 영양 상태가 불안정 했던 것 같다. 아주 사소한 생계형 트러블로 인해서도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고, 거기에 때때로 과민성 강박증의 형태로 반응하면서 뇌경색 증상은 점점 더 아빠가 일상 생활 중에 불편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하필 이렇게 병이 커가던 과정을 아빠는 65세 이후 노화의 과정으로 받아 들이고 순응하기로 한 것이다. 거기에다 선친들께서 모두 70세가 되기 전에 돌아가셔 비교적 단명하신 것을 근거 삼아 우리 집안은 단명하는 가족력이 있어서 나도 이제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고 굳게 믿어 버리고는 그것을 종종 아들들 만난 자리에서 몇 번이나 말로 하기도 했다. 그걸 들은 나나 재양이도 , 일리는 있네.’라고 생각해버리고 말았다.

 

아빠는 늬들 고생 안시키고 자연스럽게 갈거야. 어느날 내가 연락이 안되면 아빠 숙소로 전화 해봐라.’ 이렇게 까지 이야기 해놓고도 막상 우리가 아빠 몸 어디가 진짜 안좋아?’ 하면 아니 나는 멀쩡하지.’ 얼버무려 버리고, 우리는 아빠가 혼자 살면서 너무 생각이 많은가봐, 외롭나봐.’ 해버리고 마는 영원히 교차하지 않는 부자간의 평행선만 달렸다. 나도 재양이도 바쁘고 나름 힘드니까 딱 거기까지 하고 말았다. 자기 몸 하나는 정말 끝내주게 챙기는 아빠였으니까, 어디서든 잘 지내고 있겠지 철썩같이 믿어 버렸다.

 

다 지났으니까 고백하자면 첫날부터 정말 매일매일 매순간 너무나 힘들었다. 중간에 나도 무리를 하다가 퍼져서 응급실에 다녀 오기도 했고, 현실적으로 병원비가 감당이 안되기 시작했던 시점에는 모든 게 다 멈춰 버렸으면 좋겠다 바랬던 적도 있다. 내 친구들은 내가 그 벼랑 끝에 서서 아슬아슬 할 때 마다 나에게 큰 힘을 줬다. 손 잡아주고, 안아주고, 병원비를 모아줬다. 지민이랑 중용이가 나를 정말 많이 도와줬다. 너네 덕분에 잘 버틸 수 있었어.

 

너 처음 태어났을 때 니네 아빠가 거의 울고불고 하면서 좋아했어. 기왕 간병 시작한 거 그 마음 떠올리며 잘 돌봐줘라.’ 아빠 쓰러진 지 사흘째에 엄마가 병원에 날 보러 왔다가 남기고 간 말이다. 엄마의 그 말이 내 가슴에 제대로 와서 닿아 난 정말 내가 저런거 할 수 있을까 했던 간병 생활을 해낼 수 있었다.

 

첫 날 응급실에서부터 최악의 상황에도 대비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했던 사람을 일으켜 세워놓고, 잃었던 삼킴 기능을 돌려 놓아 일반적인 음식을 드실 수 있도록 하고, 몸 상태도 재활 치료가 가능한 상태까지 끌어올려 놓았다. 순전히 내 극성과 욕심으로. 그런데 정작 아빠는 의식이 돌아온 첫 날 부터 재활에 대한 의지가 없었다. 그리고 자존감이 높은 남성들이 일반적으로 그런 것 처럼, 장애가 생긴 본인의 상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비관했다.

 

조금만 더 끌어 올리면 뭔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빠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절대로 따라와 주지 않았다.

 

한번은 내가 너무 악에 받쳐서 아빠를 힘으로 억지로 일으켜 세우면서 아빠, 나는 아빠랑 달라. 나는 절대로 아빠 포기 안할거야.’ 윽박지르기도 했다. 하지만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난 그동안 세상을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고 믿고 살았다. , 그 분처럼.

아빠는 그런 나에게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안되는 게 있다는 것을 몸소 가르쳐 줬다.


포기해라, 포기해라, 포기해라.

 

올초에 아빠가 모든 치료와 식사를 거부하기 시작했을 때를 두고 어른들은 그게 가시는 마당에 정 떼는 거야.’라고 하셨는데, 이 때 아빠는 정말 너무너무 밉게 굴었다. 음식을 입에 떠넣어 주면 꿱 뱉어냈다. 어쩔 때는 입술로 나발을 불듯이 푸르륵 뿜어 버렸는데, 온 사방군데 튄 음식물들을 닦으면서 환자니까라고 이해해 주기란 쉽지 않았다. 그렇게 하기를 두달여, 처음 쓰러졌을 때 82kg였던 아빠 몸무게는 50kg 대가 됐다.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늘 큰 사람이었던 아빠가 그렇게 마를 수도 있다니. 아빠를 보러 병원에 가는 게 점점 더 힘든 일이 됐다.

 

아빠의 식사 거부가 매우 일관되게 이어졌고, 나는 아빠의 의지를 존중해서 병원에서 권했던 콧줄은 끼지 않기로 했다. 아빠도 콧줄 싫어,’라고 여러 번 정확하게 의사 표현을 했다. 아빠는 계속 말라 뼈만 앙상하게 남았다.

 

‘Good Vibes Only’, 이쯤 되니 좋은 기운만 담고 싶었던 빠르크를 끌고 가는 것에도 회의가 들었었다. 정작 내 가족은 이렇게 굶기고 있는데, 식당에서 웃는 얼굴로 음식을 파는 것이 내 업이라는 것이 너무나 아이러니여서 고통스러웠다


중간중간 어디 엎어져서 실컷 울고 싶었지만, 감정적으로 무너져 버리면 아무 것도 못할 것 같다며 버텼더니 난 그냥 어디가 고장 나버린 애가 돼버린 것 같았다.

 

나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한다고 했고, 그래서 아빠는 갔어도 후회는 없다며 장례 끝나고 마음을 잘 추스리고 있었는데 아빠의 내게 보낸 편지함에 그렇게 찾아도 없던 유서가 두개가 있었다.

 

유서는 간결했다. 본인은 세상에 어떠한 부채도 남기지 않았다는 떳떳함을 명료하게 적었고, 마지막 문단은 두 유서가 같은 내용이었다.

 

인사불성이 되면 절대 병원 가서 검사하고 치료하는 일은 절대 하지 마라...지각이 없을 시 우왕좌왕 하지 말고 차분하게 지켜보길 바란다. 다시 기록한다. 절대 병원에 가서는 안된다. 가면 나를 욕보이는 일이다.’ 2014. 8. 27

 

자연 발생적으로 병원에 갈 일이 생기면 절대 병원에 데려가지 말거라. 자연스럽게 임종을 하게 놓아 두거라. 누구 말도 듣지 말고 여기 기록대로 해다오 이아비의 부탁이다. 산소 마스크를 씌운다든가 목에 구멍 뚫고 음식을 공급한다든가 링겔을 꽂는다는가 하는 일은 나를 두번 죽이는 일이다. 절대 하지 말거라. 인륜 도덕을 앞세워 의료인 가족 친지 의사가 하려 하면 그를 저주할 거라고 이글을 보여주길 바란다. 다시 기록한다. 자연스럽게 임종하게 하거라끝.’ 2014. 8. 28

 

아빠랑 나는 이렇게 운명의 뫼비우스의 띠를 만들었다.

 

더 살고자 하는 의지가 없었던 사람을 평소에 더 잘 하지, 마지막에 붙들은 나.

 

난 그때 왜 아빠의 이야기들을 좀 더 알려고 하지 않았을까?

왜 좀 더 개입해서 아빠가 병들어 가던 것을 막지 않았을까?

왜 블로그와 이메일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아빠 살아있는 동안은 열어볼 생각조차 안했을까?


해봤자 소용이 없지 후회는.

 

처음에 보라매 병원에 두달 동안 매일 같이 있다가 재활 병원으로 옮기고 아빠가 적응을 너무 못해서 2주만에 내가 다시 아빠 돌보기로 하고 병원에 들어 갔을 때, 널찍한  2인실에 단 둘이 누웠는데 아빠가 그랬었다.

 

고맙다. 난 진짜 생각지도 못했어.’

오늘이 몇월 몇일인지도 모르던 사람이 나한테 정확히 저렇게 말했었다.

 

그래, 유언은 못 지켜줘서 미안해요. 처음에 30분만 늦게 발견 됐으면 아빠 원했던 대로 숙소에서 쓰러져 그대로 갈 수 있었겠지만, 아빠 맨날 하는 팔자 타령, 아빠 팔자는 그냥 혼자서 그렇게 갈 팔자가 아니었던 거야.

 

힘들었지만 이렇게라도 아들들이랑 마지막 시간 보냈잖아.

아들들 잘 키웠잖아.

아빠 보내주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왔었는지 봤죠?

 

아빠 마지막 묻어 드리던 순간에 내가 했던 말 처럼,

좋았던 것들만 기억할게 아빠. 이젠 진짜 잘 가. 나도 털고 잘 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