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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PE

타이베이 덕후들의 성지를 가다.

네스프레쏘 커피 마시겠다고 '도란스' 찾으러 타이베이의 온갖 중대형 전자상점들을 다 헤집고 다녀 봤지만 그것만은 찾을 수가 없었어요. 제 타이완 친구도 기계 쪽에 아예 관심이 없어서 (아이폰으로 문자 메세지 보낼 때도 독수리 타법을 씁니다.) 자기는 정말 모르겠다고 미안하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구글링 했습니다.

Guang Hua Digital Plaza
라는 곳이 있더라고요.
 

5층 짜리 신축건물입니다.


서울에 살때 전자상가에 가는 것은 제 일상의 한부분이자 삶의 큰 재미였는데요, 타이베이에서 용산 전자상가 같은 이곳을 찾게되어 전 기분이 왕창 들떴습니다. 저는 용산 전자상가를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다녔어요. 그때는 보따리 장수 아주머니들이 일본에서 밀수로 들여온 최신 일본 가전 제품을 구경하는 재미가 아주 대단했습니다. 그 꼬맹이한테도 삐끼질을 해주셨던 모든 형님들께 평화 있기를. 이후에 VJ를 하면서는 거기에 거의 한달에 두세차례씩 갔었고요, DVD가 인터넷 쇼핑몰에서 저렴한 가격에 판매되기 전까지는 DVD를 사러도 자주 갔었습니다. 또, VJ를 하면서 '내가 좋은 것을 많이 봐야 다른 사람들에게도 좋은 것을 보여줄 수 있는게 아닌가'하는 나름의 신념을 지키려 '수익의 20%는 DVD 구입에 쓴다'는 수칙을 세우고 참 열심히 사댔습니다.




그러나 이젠 블루레이 시대.

내 돈...눈물눈물 이모티콘
 

어쩜 풍경도 15년 전 용산이랑 참 비슷해요


흔히 용산전자상가를 소개할 때 '한국의 아키하바라다' 이런 표현 하는 것이 저는 좀 마음에 안 들지만요, 그 둘이 외관상으로나 기능상으로 비슷한 것은 부인할 수가 없죠. 이 GuangHua도 마찬가집니다. 용산의 15년전 풍경과 참 비슷하고요, 아키하바라와도 상당히 닮아 있습니다. 기능도 '뭐야 이거' 할 만큼 흡사합니다. 

그래서 저는 향수에 젖었습니다.

아홉시가 되며는 문을 닫는다.


조립용 컴퓨터 부품 가게 입니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죠?


타이완도 전자 산업 쪽에서는 한국과 쌍벽을 이루던 아시아의 하청 강국 이었지만, 막상 요즘의 시장 가격은 그닥 싸지 않아요.
한국 사람이 뭐든 필요한 것이 있을땐- 모든 것이 인터넷 상에서 무한 저가 경쟁 구도로 되어 있는 한국 인터넷 상점에서 사는 것이 가장 저렴합니다. 컴퓨터 부품은 아침에 주문하면 당일 배송도 해주잖아요.

타이베이 모니터 가게에서 나오는 화면은 죄다 K팝 영상입니다.


여기엔 악기 상점들도 있고요.


케이블 병에 도지면 또 한 기둥 뽑게 되죠.


오디오 매장은 언제나 기분이 좋아지는 곳


제가 전자상가를 좋아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거기에 가면 저에게 전혀 필요가 없는 희한한 물건을 발견하게 되기도 하고, 그것이 제 안에 안쓰던 부분을 자극해서 새로운 생각의 통로를 열어주곤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저는 들뜬 마음에 맥북프로 메모리 업글도 할 뻔 했고, 제나이저 헤드폰도 살 뻔 했지만, 정신 붙들고 꾹꾹 참았습니다.
 
고통스러웠어요.
 

저기 미남 있길래 찍었죠.


CCTV 카메라 상점은 상상력을 마구마구 증폭 시킵니다. 후훟!

VJ하면서 저는 CCTV 카메라를 종류별로 네개 갖고 다녔었는데요, 걔네들은 크기가 작고 설치도 용이해서 여러모로 재밌게 잘 써먹었던 장비입니다. 특히 일본의 유명한 턴테이블리스트 DJ켄타로 긱 때는 그의 현란한 믹싱 손동작만을 CCTV카메라로 찍고 받아 쏘스로 썼었는데요, 그때 켄타로씨가 그걸 보고 백스테이지에서 좋다고 엄지 손가락 들어 줬어요. 

나중에 그가 NHK의 굵직한 '열린음악회' 같은데 나와서 샤미센 연주자와 협연 하는 것을 보고, 우리 초중고교 선생님들이 강박증처럼 늘 얘기 했던 것처럼 일본이 꼭 '우리보다 10년 앞선'건 아닌가보다 생각 했어요. 고등학교 때 지리 선생님은 '일본영화 들어오면 임마 한국영화는 다 망해, 끝장이야.' 음...그래서 지금 어디가 끝장 났나요? 역시 선생님들이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신건 아니었어요.
 

뾰롱뾰롱 뾰로롱


Guang Hua 뒷골목. 정감 있죠?


애들은 가라


그쵸? 요즘 애들이 누가 이런데 들어가서 야동 사겠습니까? 번거롭게 ...따운받지.

호기심에 들어가 봤더니 역시 맨 지긋하신 어르신들이 주인장과 꽤 친한듯 허허허 시덥잖은 톤으로 대화를 나누고 계시데요. 주인 아저씨는 저 출입문 곁에 딱 붙어 앉아 밖의 누가 볼새라 손님이 들어오면 재빨리 문을 닫으시더군요.

내부의 컨텐츠는 상당히 다양한데요, 대부분 일본 작품들이더라고요.
영상물 이외에 각종 체위를 체험할 수 있는 유치뽕 일제 자위 도구들도 전시해 놓았습니다. 요즘 한국에선 인터넷으로 다 살 수 있는 뻔한 것들입니다. 하품하품이모티콘
 

따라!


드디어!!! 제가 그렇게 찾아 헤메던 '도란스'입니다.
타이완 제품인데요, 타이베이에서 가장 큰 전자상가에서도 구할 수 있는게 고작 이것 뿐이었어요.

디자인 좀 보세요. 뭐랄까 양쪽의 손잡이를 잡아 당기면 시골 야시장의 아코디언 연주자가 될 것 같은 거시기?
그러나 이거 엄청 무겁습니다. 양 팔로 들고 있기도 벅차요. 몇 정거장 떨어지지도 않은 집까지 들고 오는데 팔 빠지는줄 알았어요.

게다가 가격마저 후덜덜 합디다.
네스프레쏘 머신이 1150와트를 먹으니까 안전하게 쓰려면 약 두배 정도 용량의 승압기가 필요하다 해서 2000와트 짜리를 골랐더니-

무려 "2700" 타이완 딸라!
우리돈 10만원이 넘어요. 한국 인터넷 쇼핑몰 찾아보니 6만원이면 살 수 있던데 말이에요.
한국 제품이 의외로 디자인도 보편적으로 훨씬 더 이해가 가는, 시각적 안정감을 주는 쪽이고요.
그러니 먼저도 말씀 드렸지만, 해외에 변압기 필요한 전자제품 들고 이사 가시는 분들은 꼭꼭꼭 한국에서 변압기 사가세요. 타이완이니까 그나마 이정도 가격이지, 아마 서방세계나 제삼세계로 가시면 훨씬 더 찾기도 어렵고 더 더 비싼 값을 주셔야 할겁니다.

그리니까 요즘은 되도록 전자제품은 "프리볼트"인 것을 사는 것이 속 편한 길입니다.

아무튼 저는 친구가 준 7만원 할인쿠폰으로 얼씨구나 네스프레쏘 머신을 샀는데,

뭐,

네,

이렇게 됐네요.
 

지도까지 첨부하는 친절한 나란 남자


저 1번 출구로 나가시면 골목길 탐험하는 재미가 쏠쏠해요. 길거리 음식들도 상당히 다양하고요.
그럼, 즐덕 하시길.